엄마가 저물어간다
오른팔이 계속 저린다. 대만여행 중 마사지를 받고부터 일주일이 넘게 손가락까지 찌릿찌릿 피가 잘 안 통하는 느낌이다. 마사지를 받을 때는 기대한 시원함이 좋아서 통증을 꾹 참으며 1시간 코스에 30분 추가까지 했다. 몸에는 꽤나 강한 자극이었겠거니, 하루 이틀 정도의 통증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증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몸보다는 마음이 무척 힘들었던 여행 중에 뭉친 근육이라도 풀어보고자 찾아간 마사지였는데 멀쩡한 팔에 영구 손상을 가져온 건 아닐까 점점 불안해진다.
대만 여행 3일째 밤. 결국, 쏟아져 버렸다. 나름 애썼는데 아슬아슬 넘실넘실하더니 감정의 둑은 터지고야 말았고 나도 모르게 쌓아둔 것들이 맥없이 흘러나왔다. 폐암 치료를 시작한 후 체력에 자신감 없어하던 옥이 어느 날 갑자기 꺼낸 아이디어가 대만 여행이었다. 아들인 나, 그리고 이모인 영과 함께 딱 셋이서. 영은 엄마와 아들이 떠나는 여행에 끼는 것 같아 싫고, 본인이 가면 조카인 내가 불편해할 거라고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다. 누구보다 폐 끼치기 싫어하고 배려심이 많은 영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옥은 웬일로 이번에는 꼭 같이 가고 싶다며 영을 설득해 냈다. 이모 넷 중에 가장 가깝고, 옥이 제일 사랑하는 영과 함께 가는 여행이니 나도 흔쾌히 함께하기로 했고, 언니와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영과 옥, 그리고 나, 셋이 대만을 오게 되었다.
평생 '막내이모'라고 불러온 영과의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치와 생각이 빠르고 유쾌하며 자기표현이 분명한 영은 옥이 참 귀여워하는 유일한 여동생이다. 딸 다섯, 아들 하나. 여섯 남매의 넷째 딸로 태어난 옥 위로 언니가 셋이나 있지만, 영은 유일하게 옥의 모든 걸 나누는 피붙이다. 옥과 영 사이에-옥에게는 남동생이자 영에겐 오빠인-진이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과로사로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넘어간다. 가족의 탄생과 죽음, 고된 시집살이, 녹록지 않았던 경제 사정 등을 같이 버텨온 사이기에 전우라고 보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자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끔찍하게 챙기는 경상도 여자 둘만의 찐 케미를 가지고 우승자 없는 배려 배틀을 나이 육십이 넘도록 이어오고 있다. 이 둘이 서로의 최선에 질려하면서도 누구보다 깊이 의지하고 있음을 나는 어릴 때부터 알아챘고 이 사실은 마치 모국어처럼 나에게 스며들었다.
여행 동안 이 둘을 지켜보다가 낯선 불편함을 마주했다. 티키타카가 남다른 대화라 귀 기울이다 보면 대부분의 이야기는 나이 듦에 대한 한탄으로 방향을 트는가 싶다가 별안간 기승전-물가로 마무리되었다. 이런 대화의 80%를 주도하며 세세한 것들에 관심이 많은 영은, 옥과는 달리 질문이 많았다. 혼잣말 같은 질문에도 나는 괜히 침범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래전, 가끔 영의 집을 방문할 때, 몇 시 몇 분에 지하철을 어디서 타고 몇 번 출구로 나오는 게 가장 빠른지 챙겨주던 영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야무지고 주위를 잘 챙기는 영은 우리 가족에게 한없이 고마운 존재이지만 스타일이 달라 가끔 버겁게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선한 마음의 출처를 알기에 굳이 불편한 마음을 드러낼 이유도 없었고 그렇게 평화로운 세월을 보내왔는데, 하필 완벽해야 하는 이 여행에서 오래도록 숨기고 숨긴 불편함이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연기 같은 불편함이 자꾸 피어올랐고, 어느 순간 불편함은 불쾌함으로 둔갑해 나의 마음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떨쳐버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기에는 마음은 이미 소진된 기분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여행 시작 직전에 면역력과 체력이 약해진 옥을 위해 공항 휠체어 신청부터 호텔 선정까지 신경을 많이 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서로를 위한 좋은 여행을 위해 정신줄을 잘 잡고 있어야겠다고 결심까지 하고 왔기에 마음이 바닥을 친 이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얄밉게 쌓여가던 불편에 절여진 나는 어느새 입을 닫았고,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이상한 안개를 피우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나의 행동에 옥과 영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되려 그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져 예민해진 마음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매일 함께 붙어있는 시간이 견디기 힘들어져 혼자 돌아다니기로 하고 조식만 먹고 무작정 비 오는 거리로 나섰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골목 사이를 멈추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엉켜있던 낯선 감정 덩어리는 익숙한 우울로 그 정체를 드러냈다.
아, 또, 여기구나, 혼잣말이 나왔다. 처음 방문한 나라의 생경한 어느 거리에서 내가 마주한 건 지겹고 지겨운 마음의 바닥이었다. 표현되지 않고 삼킨 말이 저마다의 마음에서 썩고 굳어 얼마나 많이 불필요한 관계의 겹을 만들었던가. 배려라고 굳게 믿고 무의미한 껍데기 뒤에 서성거리며 얼마나 오랫동안 ‘화목한 우리 가족’의 가면을 쓰고 살았던가. 작은 불편함으로 촉발된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을 만나 어느새 깊은 우울의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고, 심해에 침전된 수많은 쓰레기를 해변으로 뱉어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모두가 등장인물로 참여하는 마음의 난장. 이 난장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속에서 썩어가는 덩어리를 꺼내놓는 일. 그건 일종의 구토이기도 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내가 낼 수 있는 유일한 힘처럼 느껴졌다. 하루종일 내리던 비가 그칠 무렵, 저녁때가 되어서야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어색하고 무거워진 분위기에 어렵게 입을 뗐다.
나는 아이처럼 울었고 아이처럼 토했다. 여행 와서 느낀 불편함으로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속에서 숨죽이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뛰쳐나왔다. 어느 누구도 돌보지 못한 마음을 꺼내 놓았더니 이야기는 이어져 자연스럽게 최근 옥의 투병까지 이어졌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걸 알지만, 나름대로 얼마나, 어떻게 마음을 썼는지 이야기를 구구절절 내뱉었다. 조카의 응어리로 받아주기엔 나의 덩어리가 소화하기 힘들었는지 영은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곧, 자신도 깊숙이 숨겨둔 섭섭함을 꺼내며 세상에 뱉어내져 본 적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니를 사랑하는 만큼 조카인 나를 깊이 애정했다는 말. 힘든 경제사정으로 어렵던 시절에도 최선의 애씀과 노력을 다한 나로부터 돌아오는 마음이 없어 섭섭했다는 말. ‘어디서 한번 꺼내본 적이 없는데’로 시작된 영의 이야기는 태어나기를 오래도록 기다려온 것처럼 분명하고 선명하게 쏟아져 나왔다. 울음으로, 웃음으로, 때론 침묵과 함께. 난생처음으로 들어보는 동생의 토로에 옥도 마음을 덧대며 각자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펼치고 또 펼쳤다. 두세 시간이 느껴본 적 없는 속도로 흘러갔다. 난 엉망진창이 된 기분과 동시에 일종의 후련함을 느꼈다. 엄마와 이모인 옥과 영 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서른다섯의 내 모습이 수치스럽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개의치 않기로 하고 꿀꺽 삼켰다. 배려의 이름으로 서로를 꽁꽁 싸고 있던 겹겹이 솔직한 얼굴을 드러내는 거라고, 최소한 서로의 진심을 마주하고 있는 거라고 믿었다. 그날 밤 나는 꽤 오랜만에 깊은 잠이 들었다.
5박 6일의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 날. 옥을 통해 지난밤 영이 밤새 우느라 한숨도 못 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옥에 따르면, 영에게 대만에서 나눈 대화는 크나큰 충격이었다고. 최선을 다해 살았건만 자식 같던 조카가 사실 자신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속상하고 괘씸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고. 나는 내가 느끼고 담아둔 마음을 용기 내어 털어놓았는데 영에게는 큰 상처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단지 서로의 진심 속에 모두가 정서적으로 편한 상태가 되길 바란 것인데. ‘우리끼리 이러면 안 된다.'라는 말로 운을 뗀 대화였다. 언제부턴가 내 사람이라고 믿는 관계 안에서 비켜진 마음을 포개기 위해, 어렵고 아프지만 최대한 많은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해 나가는 것이 나의 관계 맺기였다. 그래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애쓴 자리에서 털어놓은 진심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여질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미끄러진 공감은 비수가 되었을까? 어쩌면 허울 좋은 의도 뒤에 옥과 영이 가지고 있는 삶의 태도가 그들을 불행하게 했다고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 불편을 지적해서 나의 불행도 당신들의 불행에 연결되어 있음을 소리치고 싶었던 걸까? 내 방식대로 관철하고 싶던 그저 또 다른 버전의 ‘화목한 우리 가족’에 목매고 있었던 건 아닐까? 후회라는 단어로는 담지 못할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