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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 Mar 28. 2024

남의 말

엄마가 저물어간다 

‘비생산적이다.’ 옥이 자주 쓰던 말이다. 무심코, 농담으로, 단호한 어투로, 때론 서글프게. 이 표현을 다양한 맥락에서 들으며 자랐다. ‘엄마는 비생산적인 거 싫다.’ 시장이나 마트에서 최적의 동선으로 장보기를 해낼 때도 쓰였고, ‘우리가 비생산적인 건 안 좋아하잖아?’ 쓸데없는 지출을 가려내어 극적으로 생활비를 아낀 상황에서 승리의 미소와 함께 쓰이기도 했다. 효율과 효용을 우선하는(혹은 해야 하는) 삶에서 옥에게 훈장 같은 말이 되었을까.


생산: 사람이 그의 정신적 · 육체적 노동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노동대상에 투입시킴으로써 유용한 재화나 용역을 만들어내는 일을 가리키는 경제용어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어머니라는 이름의 생산 주체를 떠맡은 자에게 이 단어는 어떤 방식으로 스며들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옥은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경제용어를 삶으로 꿀떡 삼킨 것 같았다. ‘생산적’에 대한 삶의 태도는 마음의 일까지 영향을 미쳤다. ‘옛날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노. 비생산적인 생각은 안 해야지.’ 마음속 응어리졌던 이야기를 한참 풀어놓다가도 결국 ‘비생산적’이라는 표현을 다시 가져와 체념과 서글픔 따위를 덮는데 썼다.  


옥이 삼킨 단어는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내가 같은 표현을 자주 쓴다는 걸 서른이 넘어서야 알아차렸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하는 내가 너무 비생산적인 것 같아 싫어요.' 매주 한 번씩 받는 상담에서 같은 단어가 오래된 버릇처럼 여기저기 튀어나왔다. 생각과 감정의 차이를 몰랐을 뿐만 아니라 감정을 돌아보는 일이 어색해 견딜 수가 없었다. 서투르고 더듬거리는 내가 답답해서, ‘비생산적이니까', '비생산적이라서 굳이’의 태도로 일관했다. 서른 해 넘도록 방치해 둔 오래된 감정은 마치 외국어처럼 낯설었다. 덕분에 그 당시 마음속 깊은 우울의 진원지가 감정을 비생산적으로 느끼는 데 있다는 걸 배웠다. 우울한 내가, 비생산적인 내가 싫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20대를 가장 비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며 통과했다.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 대학에 입학하고 접하게 된 공연예술, 무대라는 세계는 나를 순식간에 사로잡았다. 우연히 지인을 따라가 보았던 연극에서 느낀 첫 감정은 감탄이 아닌 질투였다. 무대에 서있는 사람이 저 선배가 아니라 나였어야만 할 것 같은 질투심에 타올랐다. 나도 몰랐던 어떤 내가 홀린 듯 공연예술 전공으로 관까지 옮겼다. 특히 배우의 일에 깊이 매료되었는데 오디션을 보고 절박하게 얻어낸 배역으로 무대에 서는 일은 당시 나에게 일종의 신앙이었던 것 같다. 비로소 내가 처절하게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구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대학 생활 내내 몇 년을 공연에만 몰두했고, 휴학하고 6개월을 생각하고 교환학생으로 건너간 미국 대학에서는 편입까지 결정해 눌러앉게 되었다.


나의 일상은 크게 수업과 리허설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수업과 리허설 사이에는 연극과 건물 맡은 편에 있는 음대 연습실을 찾아가 발성연습을 했다. 매주 연기 수업에서는 발표할 독백 대사를 외우느라 바빴고, 방과 후에는 수업과는 별개로 학기마다 열리는 정기공연 오디션을 보느라 온 에너지를 쏟았다. 무대를 준비한다는 건 내가 아는 가장 비생산적인 일이었다. 대본은 책처럼 읽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도 없이 반복해 읽고 무대에서 보여줄 인물을 나 자신에게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안갯속에서 보이지 않는 출구가 있다 믿고 온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천 번을 읽는다고 더 나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과 말을 맞추어야 하는 무대 리허설은 더했다. 대사와 상황에 맞는 동선을 연출의 지시에 따라 시도해 보고, 수많은 사람들과 간신히 합을 맞추고 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엎어지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수개월을 맞추고 또 맞춰 마침내 공연이 올라가도, 매일매일 달라지는 것이 무대예술의 숙명이었다. 같을 수 없는 순간을 반복하는 역설. 그 순간을 위해 허공에 흩어져 사라질 음 하나, 가사 한 줄, 대사 한마디를 수백 번 반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생산적인 일인가. 나는 이 비생산적인 일을 도무지 멈출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나이만큼 많이 물어보는 전공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공연예술전공이라고 대답하면서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멋쩍었던 기분을 기억한다. 공연. 예술. 전공. 어느 단어도 내 말 같지 않았던 건 ‘예술은 타고난 사람이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탓일 거다. 예술 문화에 인색한 집안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중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에 대해서 자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컸다. 다만 예술가나 작품에 대한 감탄으로 '타고난 사람들', '역시 예술가 집안'이라고 표현하는 일이 잦았다. 그 말에 둘러싸일 때면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직접적으로 나를 향한 표현이 아니었어도, '타고난 사람'이라는 표현은 마치 나를 배제시키는 것 같았다. 단호하게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가만히 있는데 자꾸 밀려 나왔다. 타고나지 않은 내가, 예술가 집안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내가, 감히 예술을 해도 되는 걸까.  


그 시절 나를 구했던 건 ‘타고난 사람들이 하는 예술’은 아니었다. 어떤 진실된 순간을 살아내기 위해 인물에 몰두하는 일이 현실에 치여 지펴진 내 마음의 열을 다스려주었다. 돌보지 못한, 얽히고설킨 타래 같은 마음이 속에서 화를 내던 나날들. 실타래의 끄트머리를 차분히 더듬기에는 속은 뜨겁고 나는 어렸다. 실타래를 푸는 지혜 대신 태워낼 오기와 비장함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 무대에 목을 매었던 그때 나의 모든 시간은 땔감이 되어주었다. 분리배출에 실패한 쓰레기 같은 마음을 그렇게라도 태워내면 고운 재로 날려버릴 수 있지 않을까. 악취 나는 마음의 덩어리가 고결한 무취의 재가 될 수 있다면, 어떤 음, 어떤 대사, 어떤 가사에 외로운 마음을 다 태워낼 수 있기를 자주 기도했다.


그때 스쳐간 무대의 모든 순간은 찰나에 반짝하고 사라져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단어로도 일컫기 모호한 그 순간은 흔적 없이 소멸되었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그 순간을 살아냈던 내 몸이, 그 몸의 감각을 기억하는 나만이 유일한 증거라면 증거다. 가장 비생산적으로 살았던 그 시절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나. 그 순간을 통과해 지금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찰나에 기댔던 영원의 마음은 무슨 소용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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