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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Oct 04. 2023

Kwoon - Ayron Norya

남킹 에세이 #0005

시월이 오고 추석이 막 지났다. 그리고 알리칸테의 뜨거운 햇살은 조금 얌전해졌다. 한국과 다르게 봄, 여름, 봄, 봄으로 이어지는 이곳은, 그러므로 늘 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볕을 다시 보듬을 일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스페인에서 훌쩍 일 년을 채웠다.     


그동안 나는 직업으로의 소설가를 기획하고, 필명을 남킹으로 정하고, 죽을 때까지 총 444권의 책을 발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지금 15번째 책이 될 소설을 쓰고 있다. 올해 말쯤 얼추 스무 권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십 년 후면 200권, 이십오 년이 지나면 목표치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나이 여든다섯. 죽어도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시점이다.  

   

돌이켜보면 4년 전, 늘 싱겁고 적막하고 우중충하기까지 한 독일에서 벗어나 그저 바다와 바람, 하늘과 구름만 쳐다보려고 제주도로 떠날 때만 해도 애당초 소설가는 나의 버킷 리스트가 아니었다. 하지만 외로움이 친근한 벗이 되면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떠오른 이야기를 적어 자비로 두 권의 소설집을 내고 나니 은근히 욕심이 더해졌다.      


이왕 태어난 이 세상. 죽기 전에 내 이름 석 자는 남기고 싶다는 얄팍한 욕망 말이다. 물론 이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이것마저도 없다면 그 허전함을 메꿀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폴란드, 독일을 거쳐 스페인까지 왔다. 그동안 나는, 유난히 푸른 하늘을 좋아하기에 매일 저가 항공을 조사하여 기차보다 싼 값으로 동쪽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꽤 많이 돌아다녔다. 멋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구와 팬데믹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그러고 다녔을 것이다.    

 

나는 다시 음악을 띄운다. 내가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음악이다.      

Kwoon - Ayron Norya     

https://www.youtube.com/watch?v=nISsp49QOZ8     


그의 음악에는 슬픔이 배어있다. 그리고 나는 늘 그 심연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나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혼탁하게 그려 나간다.   

  

**************     


그런 일은 흔하였다. 나는 시궁창같이 낡고 더럽고 어두운 고속도로를 빛처럼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늘 그렇게 달리니 이젠 익숙하다 못해 지나치게 지겹다. 더럽게 어두운 심연에 쌓인 도시. 그 도시를 반쪽으로 빠개버린 도로는 10차선으로 늘어나 광활함과 적막감을 던져 주지만 이마저도 주말이며 절망적인 정체를 호소하는 인간들로 갇혀버린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을 주지할 수 있는 단속의 불길을 느낀다면, 그건 너가 지나치게 한가한 시간, 즉, 어둠이 모든 유혹과 쾌락과 혼탁함과 무질서를 덮어 버린 그 시점으로 가버린 상태일 것이다.     


차 문을 열자 깨알 같은 빗방울이 입속을 마구 헤치며 들어왔다. 무던히도 아끼던 갈색 조던 잠바와 윗단추는 펄럭거림에 건들거리고, 낡은 노트북 첫 장은 심하게 오두방정을 치며 세평 같은 인생의 조락을 느끼게 해주곤 한다.  

   

무슨 하늘이 이래?     


나는 불현듯 솟아오른 재앙의 심정으로, 이 도로의 끝자락에 이르면, 어쩌면 절벽이 도사리거나 시뮬레이션 버그가 흐릿하게 건들거리는 환상을 꿈꾸며, 그들이 내게 준 아픔에 더한 상처를 느끼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웠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나는 흐름을 바꾸는 재주가 탁월하다. 즉 무슨 일이든 어떤 사건이든, 복선과 함께 복잡함을 이어주고 거기에 나오는 독자의 혼란을 지속해서 바라보며 흥을 내고, 결말에 통속적으로 붙게 되는 의중을 단박에 깨쳐버리는 반정의 도구를 군데군데 심어줌으로써, 어쩌면 영원히 헤맬 수밖에 없는 독자들에게, 신선하고 깨끗하고 안정감 있는 태도로 이루어진 결과를 뺐음으로써, 종국에는 나의 글이 주는 쾌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들을 조롱하는 신의 견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망각을 놓칠 수 없는 유혹으로 받아들이곤 하였다. 게다가 나는 문장 이면의 속성과 내재한 분비물을 적절히 채에 거르고 비틀고 숨죽이고 비상시처럼 꾸며서 냄으로써 나의 글에서 느끼는 빈정거림에 대한 마땅한 혼란을 독자들이 반영할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글을 싫어하는 대표적인 부류의 사람하고는 그다지 신뢰감을 쌓을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나를 재촉하곤 한다. 그 이면에는 역시 나를 속이고 여러분을 속이고 나의 재능을 악용하고 당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빼앗는, 이 문장이 주는 악마적 시샘과 조롱이 마침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다가오는 그 시점이야말로 나를 이끌어주는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글을 주장하지도 옹호하지도 배려하지도 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건 마치 내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해서 나의 글이 그들의 인생에 바치는 모든 죄악에 대한 세련된 농담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교답고 단정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내 생각과 사상은 그냥 가벼우므로 그에 대한 다정한 호소와 영악한 절망을 느끼는 악습은 없어야 한다. 무엇을 하던 그것이 주는 슬픔은 늘 우리의 가슴에 지속해서 안타까움을 저미도록 안겨주는 놀라운 사건들에 대한 충격적 고백과 다름없는 모습이라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발 이 아픔에 대한 실토에 대하여 최초에 가졌던 의심은 거두어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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