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는 그림자 하나 없이, 물체 하나하나, 모서리 하나하나, 모든 곡선이 눈이 아플 정도로 뚜렷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은 광채 없는 빛을 발하고, 그녀는 잿빛으로 변했다.
햇빛이 내 발을 뜨겁게 비춘다. 모처럼 더운 날씨다. 바람은 진작 멈추었다. 나의, 헬리오 트롬 같은 연한 보랏빛 비로드 양복 윗도리에서 쉰내가 올라온다.
운구하는 인부들이, 장지까지 따라온 사람들을 헤집고 그늘을 찾아 흩어진다. 관이 내 발아래 놓였다. 거울이 누렇게 변색한 옷장으로 만든 관. 번쩍거리는 품이 필통을 연상케 한다.
알리나(Alina)는 눈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채 누워 있다. 관자놀이에 멍 자국이 선명하다. 입가에는 거품 자국도 보인다. 그녀는, 기름을 반지르르하게 바른, 에나멜 구두를 신었고 야들한 블라우스를 입었다. 밀짚모자로 검게 변색한 가슴 핏자국을 가렸다. 잘린 허리는 장의사가 몹시 거칠게 이어 붙였다. 그리고 너덜너덜한 다리는 낡은 숄로 가렸다.
어린 소녀가 작고 동그란 화관을 그녀의 머리에 씌우려다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 울음을 터트렸다.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다.’ 그런 말을 해본댔자 무의미하지만….
깊은 곳에서 전율처럼 그리움이 감싼다.
삶은 고통이다. 죽으면 고통도 사라진다. 그나마 그게 위안이다. 나는 애써 감정을 숨긴 채, 무심한 듯, 관을 빙 둘러싼 사람들을 훑어본다.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사실에 편안함을 느낀다.
장례식은 무척 짧게 끝났다. 연도 없이 각자 가져온 야생화를 관에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거동이 어색해 보이는 노인들이 하나둘 먼저 자리를 뜬다. 구름처럼 드리운 무더운 대기 속으로, 무심한 젊은이들이 그 뒤를 따른다.
죽음이 이제 늘 가까이에 머문다. 이제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지극히 가벼운 삶으로 바꾸어 버린다.
살고자 하는 욕망. 그것뿐이다.
**********
그녀의 방은, 폐허의 도시에서 제법 떨어진, 변두리 주요 도로에 닿아있다. 혼탁하고 헛된 소음이 늘 떠다녔다. 대형 전투용 드론과 장갑차들의 진동이 그녀의 거친 심장 소리만큼 몸 전신에 파고들었다.
대문과 벽에는 다양한 색상의 래커칠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작은 뜰에는, 뱃머리의 조각처럼, 비바람에 젖은 낡은 옷가지들이 쌓여있었다. 마치 그녀를 둘러싼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나고 가라앉고 변색하는 것처럼.
나는, 칸살이 붙은, 그녀의 작은 침대 벽에 몸을 기대어, 햇볕에 그은 색상이 그려낸 창을 바라보곤 하였다. 나의 눈은 일련의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으로 채워졌다.
비둘기색 커튼은 늘 축 처져있었다. 금작화 나무가 앙상하게 죽었다. 마른 가지에는 찢어진 깃발이 펄럭였다. 그리고 멍한 눈동자는 아무것도 없음이 된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그렇듯, 과거, 현재, 미래가 혼재하는 고질적인 환상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특히, 그녀에 대하여.
그녀는 모든 것을 씹듯이 저미며 진솔함으로 다가서지만 늘 일정한 거리에서 머물렀다. 나는 흐릿하게 절단되어 그녀의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이런 느낌은, 드러나지 않고 내밀하게 색조들이 결탁한 끌림을 주어, 시선을 고정하였다.
늘 그녀를 향했다.
**********
그녀를 만나기 직전, 나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에 도착했다.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지만, 조리사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활기도 없고 확신도 없었다. 나는 그저 이방인의 도시에 살기를 원했다. 잘게 썬 고독이 박힌 거리를 걷고 싶었다. 사교나 형식, 관습과 규율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냥 자유로운 번뇌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섹스를 하였다.
한없이 맴돌아 나가는 사소한 갈등과 절대로 떨쳐버리지 못하는 간결한 끌림과 반항을 애써 무시해버리는 현대인이면 의당 겪는 부조리는, 내가 그녀의 혀를 핥는 순간 말끔히 사라졌다. 신기하였다.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2022년 6월 4일. 그녀는 날아든 포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사랑한 지 꼭 10일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