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불안에 대한 과장된 비중

by 임풍

어린 시절, 가게에서 파는 장난감을 갖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서, 장난감의 가격이 비싼지, 싼지 구분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종종 가성비가 나쁜 장난감을 사기도 했다. 그때는, "이 호루라기를 너무 비싼 값을 주고 샀다"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이는 우리가 어떤 물건이나 경험이 예상보다 비쌌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사람의 소비 습관에는 묘한 점이 있다. 예를 들어, 필자도 대학 시절 8,000원짜리 영어 사전을 쉽게 사지 못하면서도, 그보다 몇 배 더 비싼 술값은 주저 없이 지불한 경험이 있다. 어떤 사람은 몇 천 원짜리 콩나물 가격을 따지면서도, 수백만 원하는 명품 가방을 살 때는 가격에 개의치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험들을 종합해 보면, 같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 체계에는 어느 정도 과장이 있지 않나 싶다.

이처럼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감정은 종종 이상화되거나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문학 작품, 영화, 드라마에서 사랑을 너무 성스럽게 묘사하다 보니, 우리는 사랑에 대해 너무 높은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연애를 할 때는 마치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처럼 헌신하다가, 결혼 후 현실적인 사랑에 직면하면 그 열정이 식고 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갖고 있는 사랑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만난 상대로부터 <로미오와 줄리엣 > 수준의 헌신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영화 <젊은 교황, The Young Pope>에서 교황 피우스 13세(지드로 롬)가 "우리는 사랑에 대해 너무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이 대사는 사랑에 대한 일반적인 신념과 기대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람들이 사랑을 신성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사랑을 이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비판하며, 인간관계의 복잡성과 현실적인 측면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결국, 현실에서의 사랑은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 묘사되는 이상적인 사랑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사랑만이 아니라, 오늘날 고도 소비 사회에서는 모두가 영화배우나 모델처럼 자신의 미모와 의복을 맞추려고 한다. 소비 사회가 설정한 높은 미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다 보니, 각자가 가진 독창적인 미의 기준이 사라져 버린 셈이다. 현대인들은 사회가 부여한 기준에 맞추느라, 자신만의 감정 체계에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현대인들이 자주 느끼는 불안감이 지나치게 과장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마치 사랑에 대해 너무 높은 가치를 부여하듯, 불안감에도 과도한 강도가 부여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별것 아닌 문제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불안해하고, 그 불안감을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키워버린다. 이는 현대인들이 불안감이 크고 심각해야만 뭔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불안감은 인간에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계하고 조심하라는 신호일 뿐이다. 단세포도 먹이가 있으면 몸을 늘려서 다가가고, 위협요소가 있으면 즉시 몸을 움츠린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성장을 위해서는 몸을 펴서 달려가고, 심신의 위협이 있을 때는 몸을 잠시 움츠리고 피하는 것이 좋다. 이때 피하라는 신호가 바로 불안감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생명현상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불안감이 일어나면, 그에 대한 추측과 억측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원래의 불안감이 크게 부풀려진다. 우리는 그렇게 불안해야만, 마치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비현실적인 억측요소들이 무너지고, 어떤 불안감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심각하게 다가오고, 결국 사라지게 된다. 다만 그 자리에 다른 불안 요소가 자리 잡을 뿐이다.

​사랑이 결국 별것 아닌 것처럼, 불안도 별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한다고 매달렸던 사람과 싸우고 헤어질 수 있듯, 그토록 불안했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지나가게 된다. 사랑이든 불안이든, 결국 그것들은 모두 인생이라는 과정 속의 감정일 뿐이다. 과장된 불안감이 습관처럼 반복하면, 존재 자체에 대한 극도의 절망감에 빠질 수 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절망을 죽음보다 더 무섭게 여겼다. 그의 사상에서 절망은 단순히 슬픔이나 고통을 넘어서,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갈등과 위기를 의미한다. 그는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 The Sickness Unto Death>에서 절망을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태"로 정의한다. 즉,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상태가 절망에 해당하는데, 이는 죽음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죽음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지만, 절망은 계속해서 내면에서 삶을 갉아먹는 지속적인 고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그 자체로 인간 존재의 심각한 위기임을 강조하며, 그것이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이유는 그 절망 속에서 인간이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