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토너 」를 읽고
스토너의 첫 문단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이 말이 왜 처음부터 나왔을까?
사람들의 잣대는 그 사람이 사회에서 얼마나 성공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첫 문단을 읽으면서부터 스토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며 궁금해졌다.
이 소설에는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스토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다인 소설이다.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농과대학을 갔으나
2학년 때 들은 영문학이 좋아 그와 관련된 수업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수업이 스토너와 잘 맞았는지 성적이 좋았고, 그를 눈여겨본 교수님의 권유로 대학에 남았다.
그는 자신이 교수가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니 교수가 되어 있었고,
그 삶에서 자신의 재능과 기쁨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아니, 적어도 내 삶도 그런 듯하다.
생명공학을 선택했고, 그 전공이 석사까지는 가야 한다고 해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생명공학의 특성상 동물실험을 해야 하는데, 동물 실험이 힘들고 견디기 힘들어
진로를 과학기술정책을 하는 업무로 눈을 돌렸다.
우연한 계기였다. 하지만 이게 나의 적성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일이 재미있었고 그 일을 좀 더 잘하고 싶어 '과학기술정책학'이라는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나에게 더 와닿았던 것 같다. 내 삶 같아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삶 같아서...
스토너에 나온 문장이 있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 해요.
→ 10년이나 늦는다는 것은 누가 정한 것일까? 사람들의 잣대로 정한 저 10년이 중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 방향이라도 잡기만 해도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했다.
→ 나는 사랑에 빠진 적이 있을까? 언제가 한 번은 나와의 연애를 해보자라고 결심한 해가 있긴 했었다. 하지만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조차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데,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 두 문장을 보며 나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나를 알아감에 대해 시를 써 보고 싶었다.
<존재>
나는 한참 뒤에야
불이 켜진 방에 들어왔다
이미 누군가의 발자국이
바닥에 남아 있었지만
내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각자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나는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이 방이 나를 부른 건지
잠시 머물다 가도 되는 곳인지
알 수 없어서
열 개의 계절쯤 흘렀으나
나는 여전히 어느 쪽에도
몸을 기울이지 못한 채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불빛을 조금 옮겼다
방 한가운데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사랑은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비추었을 뿐.
지금도
나는 내가 앉아야 할 의자를 찾지 못했다.
늦게 켜진 이 불 아래에서
나는 비어 있던 자리를
천천히 채우는 중이다
읽은 마음은 오늘도 시가 되어 이곳에 머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