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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할 수 없는 당신에게

공습경보가 울렸을 때, 나는 20층에 있었다

by 이워너

조금 오싹한 가정을 해보자.


20xx년, 미국 대통령은 부자나라 한국을 더 이상 공짜로 지켜줄 수 없다며 천문학적 규모의 방위비를 요구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선을 다해 협상했지만 미국 대통령의 입맛을 맞춰주지 못한다. 지지부진한 협상을 지켜보던 미국대통령은 하루아침에 주한미군에 철수 명령을 내린다. 이미 대통령의 충복들로 채워진 미군은 그 누구도 반발하지 않고 신속히 철수를 시작한다.


같은 시기에 북한의 독재자는 심각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주변의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대북제재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미사일 도발의 효과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이때 중국이 악마의 제안을 한다. 미국이 정신을 놓은 틈에 타이완을 기습 점령할 테니 북한은 양동으로 서울을 공격해 달라는 것이다. 탄약과 물자 지원까지 약속받은 북한의 독재자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면 도박을 걸어 중국의 지원이라도 더 끌어내는 것이 상수였다. 마침 미군은 철수를 막 끝낸 참이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와는 관계없이, 당신은 오랜 지병을 안고 있다. 현대인의 고질병 허리 통증이다. 최근에는 며칠 무리를 한 탓인지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빠른 이동에는 큰 제약이 생겼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니 통증이 더욱 심해졌다. 도저히 출근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당신은 연차를 내 병원을 예약했다. 겨우 몸을 일으킨 당신은 힘겹게 소파에 몸을 기댄 뒤 TV를 켠다.


TV속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뉴스 속보다. 중국이 결국 타이완 공격을 감행했다. 미국은 긴급히 규탄 성명을 발표했지만 섣불리 파병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타이완이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는 모호한 메시지만 흘러나온다. 뭔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대통령 바뀌더니 맛이 갔구나' 혼자 중얼거리던 당신은 곧 미국이 뭘 지켜보고 있었는지 곧 이해하게 된다.


TV와 휴대전화에서 동시에 끔찍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공습경보. 서울, 경기, 강원지역. 가까운 지하시설로 대피하고 방송 청취'


미국이 지켜보고 있던 것은 북한의 양동이었다. 아니, 그 따위 건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도저히 걸을 수 없는 몸을 이끌고 당신이 내려가야 할 지상은 20층 아래에 있었다. 힘겹게 현관문을 열어 보니 이미 엘리베이터는 매 층마다 멈추고 있으며 계단은 서둘러 내려오는 사람들로 시끄럽다. 허리가 아픈 당신은 도저히 그 틈을 비집고 내려갈 도리가 없었다.


재난 주관 방송사는 즉시 재난 방송으로 전환되었다. 아나운서는 여러 행동 요령을 긴급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가장 주요한 내용은 가까운 대피소로 신속히 대피하라는 것. 그렇지 못할 경우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대피하라는 것, 도로 한복판에 있을 경우 차를 길 가에 대고 지하철 역으로 대피할 것 등 많은 대안 역시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파트 20층 위의 요통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당신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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