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법하게 지어진 고층 아파트는 방재 기술의 집약체이다.각 세대는 서로 화재로부터 격리된 방화구획이다. 매일 열고 닫는 철재 현관문도 두 시간 이상 화재를 막아주는 갑종 방화문이다. 일정 높이 이상의 주택은 발코니 인근에 피난공간을 갖고 있으며 유사시에 발코니를 통해 1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비상 사다리를 갖춘 곳도 있다. 세대별로 화재, 가스 감지기를 갖추고 있으며 화재 진화용 스프링클러, 가스레인지 위에는 화재 확산 방지용 소화기도 있다.
화재 시 비상대피로 또한 사전에 계획되어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피난층은 정해져 있고 그곳으로 향하는 문의 방향과 개폐여부까지 통제된다. 왜 아파트 현관문은 다 바깥쪽으로 열릴까? 비상계단의 방화문은 왜 불편하게 항상 닫아놓으라고 할까?
피난층으로 향하는 문이 동선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므로 무조건 피난방향으로 열려야 한다. 집에서 탈출하는데 방해가 없도록 바깥 방향으로 열려야 한다. 한편, 모든 층을 연결하는 계단실 방화문은 어디서든 화재가 나더라도 다른 층으로 연기와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그래서 항상 문을 닫아놓으려는 관리사무소와 편의를 추구하는 입주민들 사이에 방화문을 놓고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불편을 해소하고자 최근에 지어지는 아파트들은 화재 시 자동 개폐장치를 달고 평소에는 방화문을 열어두고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집안으로 불이 번져서 탈출이 불가능한 경우가 발생하면 꼼짝없이 불속에 갇혀 뒤주엔딩을 맞이한다. 이때를 대비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소방관이 접근하는 시간을 버는 공간으로 대피하는 것과 하향식 피난구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고층아파트 발코니 옆에는 의문의 공간이 존재한다. 이 공간은 실내임에도 단단한 방화문으로 격리되어 있다. 바닥이 그냥 타일로 마감되어 있다면 그곳은 단순한 대피공간이다. 그 대신 무언가 경고표지가 붙은 금속제 문이 바닥에 붙어있다면 그곳은 하향식 피난구실이다. 화재가 발행하면 자동으로 전 층의 피난구가 개방되어야 하므로 평소에도 물건을 쌓아둬서는 안 된다. 나를 포함해 모든 윗집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민폐다.
그렇다면 다시 공습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이때에도 그럼 그 비상공간으로 대피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욕실 같은 곳에 숨었다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모두가 알다시피 공습상황과 화재상황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공습상황의 위험은 집 밖에서 날아오지만 화재상황의 위험은 건물 안에 있다. 공습상황의 리스크는 외부에 노출되는 일이지만 화재상황의 리스크는 내부에 갇히는 일이다. 따라서 모든 대피공간의 한 면은 외부에 노출되어 소방관의 접근이 용이하게 설계된다.
공습상황에서 대피공간에 숨어있다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자폭 드론과 아이컨택하기, 장사정포 포탄과 러시안룰렛하기, 버섯구름 방사능 불꽃놀이 감상하기 등이 있을 수 있겠다. 그리고 그 순간이 아마 인생의 마지막 기억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존한다 해도 강렬한 트라우마와 심각한 부상이 따를 수 있으므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공습 상황에서 대피공간으로 피난은 절대로 추천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