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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짱ㅣ원시인 Aug 06. 2022

존댓말뭉치

말의 힘이 여기서 나타난다. 말 속에 담긴 마음의 힘임을...

말의 힘이 여기서 나타난다. 말 속에 담긴 마음의 힘임을...


초등학교 때 일이다. 아마 그 무렵은 세상 어떤 것들을 조금씩 알아가며 머리가 굵어지고 있을 나이였던 것 같다. 엄마는 갓 지은 밥에 구수한 된장냄새를 풍기는 찌개와 잘개 담은 밑반찬을 한상 가득 번쩍 들고 부엌에서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기윤이 엄마가 그러는데 말이야. 기윤이가 네가 엄마한테 존댓말을 쓴다고 자기도 앞으로 존댓말을 쓰겠다고 했다는 거야. 그러면서 기윤 엄마가 널 엄청 칭찬하더라고.. 우리 아들! " 그 말 후 나는 밥을 먹으며 엄마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맞다. 나는 언제일지 모르는 나이였을 때부터 아마 말을 배웠을 때부터 였을 것 같다. 나는 늘 부모님께 존댓말을 썼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윤이 엄마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치 무엇인가로부터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다. 칭찬인 것 같은데 이게 칭찬받을 일인가? 그냥 나는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 누군가의 지도 편달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물론 부모님이겠지만)내게는 숨을 쉬듯 그냥 일상이었다. 그냥 그 상황이 칭찬받을 특별한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생소했을 뿐이다. 그냥 나름 컬처쇼크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왜 존댓말을 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존댓말은 내게땔 수 없는 숙명의 본능이었는지, 난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보니 꽤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동네 꼬마 중 어느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기세로 사고만 치는 개구쟁이였다. 그늘의 위세를 따라 이끼가 돌 사이에 가득 차고 자동차 하나 겨우 지나갈까 말까 하는 골목길이 나의 주무대였다. 나는 이곳에서 거친 녹과 삐그덕 찌그덕 소리를 장착한 자전거로 질주하며 친구들과 레이싱을 밥먹듯이 즐겼다. 당연히 난 매번 1등이었다. 가끔 실수로 커브길에서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담벼락에 돌진할 때 빼고 말이다. 어느 날 똑같은 곳, 같은 모양 벽돌이 보이는 담벼락을 다시 만나고 살짝 깨져 핏빛이 비치는 아픈 엄지발가락을 부여잡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왜 난 지난 과오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는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그렇게 또 다음날 나는 담벼락을 향해 돌진했다. 난 그렇게 유별나게 개구쟁이였다.


유난히 더운 어느 날이었다. 햇살이 살짝 들어오려다 사라지는 유일한 방 안에 친구들을 잔뜩 데리고 들어왔다. 나는 조금 있음 떨어질 듯 너덜너덜한 과일 모양 스티커가 붙은 하늘색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화장실 물을 푸른 바가지에 가득 채웠다. 겨우내 때운 불로 인해 누렇게 들뜬 비닐 장판 방바닥에 나는 바가지 물을 골고루 들이 붓고는 머뭇거리는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이렇게 하는 거야~!" 하며 난 몇 걸음 도움닫기 후 멋지게 슬라이딩하였고 잠시 뒤 동태눈처럼 툭 튀어나온 화면의 골드스타 왕관이 보이는 낡은 텔레비전 박고 멈춰 섰다. 박는 순간 텔레비전에 달려 있던 안테나도 힘없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마구 장판 위로 스쳐 날아가며 여기저기 부딪히고 소리 지르고 웃으며 방바닥과 혼연일체가 되었다. 방바닥에 고였던 물들이 개구쟁이들 슬라이딩 때문에 어두운 가구 밑으로 흘러들어 가면, 난 화장실에 들어가 누런 비닐 장판에 다시 물 보충을 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네 아이들과 놀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들은 사라지고 엄마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그렇게 두들겨 맞으며 머릿속은 슬라이딩하며 즐거웠던 짜릿한 순간을 상상하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난 엄마가 오시기 전에 친구들과 몇 번 방바닥 슬라이딩 놀이를 했다. 물론 그때는 두들겨 맞지 않았다. 퇴근한 엄마가 방문을 열기 전에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햇살 따가운 미끄럼틀 난간에 다리만 쭉 내밀고 흔들며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맞다. 어릴 때부터 사고뭉치가 내 트레이드 마크였다. 물론 양띠인 나는 본심은 양처럼 순했다. 지금도 말이다. 순하기 순한 개구쟁이가 허구한 날 혼나는 것에 익숙했던 내게 칭찬이라니 난 내가 칭찬받은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존댓말이 이런 상황을 연출시켜주는 것이지? 나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나는 웃어른께는 당연히 존댓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수정시켜 낳아준 부모님에게 존댓말은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다른 언어와 달리 존댓말이라고 정확히 살아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말이다. 언어에 있으니 용도에 맞게 쓴 것 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맹신이었다.   


내가 살던 집 골목길 끄트머리에 작은 슈퍼마켓이 있었다. 나는 단골이었고 누구에게나 그렇듯 슈퍼마켓 방문은 소소한 행복이었다. 나는 270원짜리 새우깡을 집어 들고 계산 후, 주인 아주머니 입이 열리기도 전에 "안녕히계세요."라고 하며 기분 좋게 딸랑거리는 문을 열고 나왔다. 나에게 새우깡을 줬으니 얼마나 고마우신 분인가? 지금 생각하면 반대여야 하지 않은가? 새우깡을 팔아줬으니 아주머니가 감사 인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라고 말이다.

새우깡을 실컷 먹고 나는 잠실 석촌호수를 가려고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십 원짜리 가득 후루룩 돈통에 털어 넣으며, "아저씨! 석촌호수 가요?" 이렇게 묻고 아저씨의 귀찮은 듯한 눈빛과 마지못해 입 밖으로 내뱉으려다 고개만 끄덕이는 사인(sign)으로 기분 좋게 버스에 올라탔다. 이처럼 한 번도 보지 못한 시무룩한 아저씨에게 나는 존댓말로 응수를 했다. 세어 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나보다 수만 번은 더 밥을 먹었을 것이고 숨을 쉬어도 수억만 번은 더 쉬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나는 덜컹거리는 버스의 굉음을 타고 차창 밖의 빨간 골조와 커다란 크레인 사이에 불뚝 솟아오르고 있는 거대한 건물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저기에는 뭐가 있을까? 같이 탄 친구 놈이 대한민국 최고 놀이공원이 된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놀이공원 치고는 너무 큰 거 같았다. 저 크기로 봐서는 아마도 거인들의 놀이터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신나게 놀다가 집에 가는 버스를 다시 탔다. 그런데 나는 바지가 다 젖어 있었다. 맨손으로 물고기 잡는다고 석촌호수에 뛰어들어갔기 때문이다. 집에 가는 버스가 왔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큰둥 머리 반짝 버스 아저씨 앞 돈통에 동전을 빠르게 넣으며 "안녕하세요."라고 공손히 인사하며, 돈통으로 향하는 아저씨의 시선을 최대한 뺏으려고 노력하며 상냥하게 인사하고 버스를 타고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버스 아저씨는 무엇인가를 알면서 모른 척한 것 같았다. 폴 빌라드의 소설 ‘위그든씨의 사탕 가게’ 버찌 씨를 가져온 아이처럼 말이다. 위그든 사탕가게 아저씨는 버찌 씨 여섯 개를 가져온 아이의 동심을 깨지 않으려고 사탕을 주고 거스름돈까지 주며 아이의 동심을 지켜줬다. 그런데 버스 아저씨가 지그시 나를 태워 줬던 이유는 석촌호수에 빠져 바지가 홀딱 젖은 개구쟁이를 얼른 집으로 보내줘야겠다는 따뜻한 마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바다 같이 깊고 우주 같이 넓은 아량이 내가 웃어른들에게 존중하고 존댓말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집에 간 나는 엄마의 잔소리 폭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잡고 싶었던 송사리 떼를 생각하며 나름 위급한 *진돗개 1단계 훈련 같은 상황을 버티고 버텼다.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난 엄마에게 외쳤다.  "엄마~~ 밥 주세요." 난 그때도 쿨했다.


지금은 어여쁜 두 딸을 장성?시킨 아버지가 되었다. 고등학생, 중학생이면 다 키운 것 아닌가? 먹이고, 재우고, 똥 치우고, 놀아준 것, 밖에 없는데 어느덧 훌쩍 커버렸다. 큰아이가 한창 말을 배우며 귀여움을 떨 때 일이다. 그녀는 짧은 단어로 재잘되며 서술어까지는 표현하기 어려워 어버버 말하며 기저귀 차고 돌아다니다 식탁으로 끌려왔다. 이유식인지 먼지 본인 의지와 상관없는 아빠표 음식을 입에 넣다 불연 듯 "압빠 물!"이라고 외쳤다. 나는 양손으로 잡아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말랑이 빨대가 달린 국민  개구리 물통을 아이 손에 건네며 "물 주세요. 라고 하는 거야."라고 신상품을 영업하듯 존댓말이라는 것을 멋들어지게 선보였다. 왜냐면 뭐든지 초장에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 달리기도 초반에 쭉 뽑아야 한다. 나중에 지쳐 흐르더라도 힘이 있을 때 최대한 뽑아내야 그나마 최선의 기록이 나오듯 말이다.


그런데 한창 말을 배우는 아기새의 수많은 조잘거림이 울릴 때마다 매번 존댓말을 가르치기란 쉽지 않았다. 사실 나도 귀찮았다. 그냥 내버려두고 싶었던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귀찮아도 자꾸 가르치고 또 알려주었다.


혼자 보다 둘이 낫듯이 혼자 공략하면 안 된다. 공공의 비전으로 똘똘 뭉친 아내의 엄호 지원을 통해 우리는 해내고 말았다. 이게 뭐라고 말이다. 그런데 불현듯 하늘에서 둘째가 턱 하니 떨어졌다. 아니 성모 마리아도 아니고 먼 일 이래? 아무튼 이게 무슨 행운인지 둘째도 딸이다. 이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둘째는 세살 터울 언니 때문인지, 아님 병원놀이 중 나 몰래 뒷방으로 끌려가 언니한테 군기 잡혔는지, 나의 두 번째 그녀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쩰리 주세요."라고 언니 따라 말문이 트이는 것이다. 그래 둘째는 거저먹었다.


가끔 카페에 갔는데 옆 테이블에서 유치원이나 다닐 만한 아이가 지극히 아이다운 목소리로 엄마에게 존댓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애땐 얼굴만큼이나 마음씨가 참 예뻐 보인다. 엄마는 좋겠다. 저런 아들 두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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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말에서 나옴을 누구보다 잘 알고 겪었기에 존댓말을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말에서 사람의 마음과 행함이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우리 두 딸들은 정말 부모님에게 예쁘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니 딸들이 전하는 따뜻한 마음도 느껴진다.


그럼 반말하면 존중하지 않고 사랑이 없는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하지만 존댓말을 한다면 최소한 상대를 무시하거나 가슴에 상처가 되는 말을 최소화하는 마법은 존재한다. 최소한 부모 자식 간에는 더더욱 말이다. 우리는 가깝고 친하다는 이유로 말을 편하게 할 때가 있다. 가족 간에 더말이다. 그로 인해 오히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받아서 더욱 마음의 골이 깊어지기도 한다. 역지사지라 했던거 반대로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 아끼고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더욱 존중하는 말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언어에서 존댓말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돗개는 전쟁이나 적의 침투가 예상되는 위협 상황에 발령되는 단계별 전투준비태세 경보로 1단계는 전면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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