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 만들기
우울과 불안이 심하면 일상생활은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우울은 나를 더디게 만들고, 불안은 나를 다급하게 만든다. 더딤과 다급함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엔 행동이 멈춰버린다. 불안하기에 온종일 무언가에 대해 계속 조급함이 올라오지만, 우울이 행동하는 걸 막아버린다. 그 때문에 다시 불안하고 우울해진다. 그렇게 멈출 수 없는 굴레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루틴이 필요하다. 나의 심리 상태와 관계없이 가능한 한 무조건 지켜야 하는 나와의 약속 몇 가지. 이것마저 없던 때에는 하루를 그야말로 흘러가듯 살았다. 그 당시 오로지 내가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살아있기' 뿐이었다. 하루 종일 모든 감각들을 과하게 활성화시켰다. 머리뿐 아니라 눈, 귀, 입, 손을 쉬지 않고 괴롭혔다.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뜨개질을 하거나 밥을 먹고 그림을 그렸다. 그 모든 것에 모든 정신을 쏟아부었다. 스스로 뭔가를 했다기보단 그저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하며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우울과 불안을 느낄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였다.
지금 나에겐 몇 가지 꼭 지키고자 하는 규칙들이 있다.
그중 첫 번째로 만들었던 규칙은 '가족들과 함께 점심식사하기'였다. 밤낮이 완전히 바뀌고, 그마저도 규칙적이지 않던 날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 중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너무 외로웠다. 그래서 이 도전을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무언가를 먹으면 아주 높은 확률로 배가 아팠었다. 1년 365일 중 365일을 배가 아팠다. 심리적인 이유라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나아지질 않았다. 그래서 음식 먹는 걸 늘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눈을 뜬 직후에 가장 심하다. 한마디로 자다 깨서(심지어 원래 일어나지 않던 시간에) 첫 끼니를 가족들과 함께한다는 것은 나에게 정말이지 상상만으로도 포기하고 싶어지는 큰 도전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는 강박이 아주 심하다. 흔히 말하는 강박장애와는 양상이 조금 다른 것 같다. 나의 강박은 주로 '꼭 이렇게 해야 해'라든가 '이건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하면 안 돼'라는 식의 생각들이다. 이 강박 때문에 모든 새로운 도전의 난이도가 높아진다.
내 강박을 첫 번째 규칙에 적용해 보자면, 내가 생각한 이 규칙의 성공 기준은 이 정도이다.
1. 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하므로 원래 가족들의 식사 시간을 그대로 지키기.
2. 식사란 본디 밥을 먹는 것. 온전한 한 끼의 식사를 해야 한다.
3. 밥을 먹다가 배가 아프면 안 된다. 배가 아프면 화장실에 가야 하기 때문. (당시 나는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가는 모습을 보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한마디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4. 평소와 달리 일어났다고 식사 후에 다시 잠을 자면 안 된다. 이미 하루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내가 적으면서도 숨이 막힌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이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고, 이 모든 걸 지킬 각오로 첫 번째 규칙에 도전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였다. 물만 마셔도 배 아픈 내가 저런 어마어마한 규칙을 전부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며칠에 한 번씩, 몇 주에 한 번씩 계속 도전을 했다. 점점 성공에 가까워졌을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점점 성공의 기준이 깨지기 시작했다. 밥을 별로 먹지 못해도, 밥을 먹자마자 배가 아프고 지쳐서 다시 잠이 들어도,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고 그 자체가 성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지금 몇 년째 가족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다. 가끔은 컨디션이 안 좋아 늦게 일어나기도 하고, 밥을 거의 못 먹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의 날을 가족들과 함께 시작하고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방에서 지내던 내가 이제는 방문을 활짝 열고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들과 함께 지낸다. 이는 나의 삶에 정말 큰 영향을 끼쳤다. 세상에서 동떨어진 기분만을 느끼던 나는 이제 집에서만큼은 소속감을 느끼게 되었다. 스스로 규칙을 잘 지키고 있다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성취감도 함께.
이처럼 일상이 무너진 사람에게는 하나의 루틴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내 인생밖에 살아보지 못했고 그렇다고 전문가도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나의 루틴들을 조금씩 공유해보려 한다. 그 시절 삶이 막막했던 나처럼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오늘도 여기저기 인터넷 세상을 돌아다니는 누군가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