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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Jun 07. 2016

소설은 자연

김영하 <읽다> 

김영하의 산문집을 연달아 읽었다. <보다>, <말하다>, <읽다>로 출간된 순서대로 읽었다. 책 세권은 박스 하나로 묶여서 팔리고 있었고, 중고로 시중가의 30%가격으로 구입했다. 책을 잡은날 2권을 읽고, 하루 묵혔다가 어제 오늘 마지막 권을 읽었다. 


쓰기는 읽기가 선행해야 한다는 사실(어쩌면 진리일 지도 모른다)을 확인했다. 보다와 말하다를 연달아 읽은 날, 난 글쓰기가 편해지는 걸 (아주 잠깐) 느꼈다. 구태여 작문하지 않아도, 책에 등장하는 어휘와 문장을 따라 쓰고 있었다. <읽다> 마지막 쯤에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요?"라는 질문에 김영하는 이렇게 답한다.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축구 경기를 보고 나서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가 친구들과 공을 차기 시작한, 다른 아이들보다 단연 빠르고, 운동신경도 좋아 학교 코치의 눈에 띄게 되는 어떤 아이가 있을 것이다. 작가가 된 내 사정도 비슷하다. 책 읽기를 좋아했고, 그러다보니 비슷한 걸 써보려고 끄적이기도 하다가, 주변 사람의 주목과 격려를 받다가, 어느새인가 작가가 된 것이다." 


김영하는 글쓰기를 말할 때, 재미와 자기만족이 필요조건임을 내세운다. 남을 위한 글이 아닌 자기가 쓰고 싶어서 쓸 때, 비로소 쓴다고 말이다. 쓰는 행위는 힘든 노동이다. 힘들지만 돈은 안되고 골병들기 딱 좋은 일이다. 실제로 직업군별 평균수명을 조사한 보고서에서 작가는 가장 단명하는 걸로 나온다. 그럼에도 쓰는 이유는 결국 그 일이 재밌거나, 자존감을 올려주기 때문이 아닐까. 김영하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있었고, 내 스스로도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난 이 질문없이 써왔다. 내 글쓰기의 토대는 그만큼 빈약했다. 질문은 글쓰기의 양분이다. 묻지 않으면 답도 없다. 글은 세상을 향한, 어쩌면 나 자진을 향한 대답이다. 질문을 하지 않은체, 나는 남의 대답만 필사해왔던 건 아닐까. 그런 탓에 내 안에 남의 자리를 마련해두고, 그에게 검열자의 지위를 부여해왔던 건 아닐까. 그는 늘 내게 말했다. '유익한 글을 쓰라'고. 


김영하는 글(소설)의 무용성에 대해서도 말한다. 생산성에 직접 기여하는 않는 글이 소설인데, 왜 우린 소설을 읽고 쓰는가. 쓰는자의 심정은 재미이고, 읽는자의 심정은 자연이다. 작가는 재미로 쓰고, 읽는 사람은 마치 '산이 거기 있어서 오른'것처럼, 소설이 거기 있기에 읽는, 즉 자연을 경험하는 방식과 같다. 소설 뿐만 아니라 모든 글의 효용성에 대한 담론은 이 범위에 들어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있음으로 읽고, 읽음으로 있음의 다른 일부가 되는 것. 소설은 그거 자체로 자연이라는 김영하의 말에 동의한다. 


지난 밤 거실등 주위를 맴돌던 곤충 한마리가 있었다.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그 녀석은 아침에 소파 팔걸이에 온몸을 떨며 실신한채로 널부러져 있었다. 어제 오후 베란다로 들여놓은 방울토마토 화분은 제자리에 있으면서 꽃을 피워냈고, 아이는 일어나자마자 토마토를 옹알거렸다. 아내는 옷을 걸치며 출근했고, 나는 아이를 챙겨 처가로 데려갔다. 모두 생명이 있는 것들임으로 그에 따라 움직였다. 글은 이런 사태를 설명하기 보다, 그 자체로 또 다른 생명이고 자연이다. 밤새 책은 책장에 꽂혀 있어고, 그 중 어느 한 권(<말하다>)이 내 세계에 틈입해 나를 다른 나로 인도한다. 소설은 자연이라는 말이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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