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공정이 디테일의 수준을 가른다
사무실근처 공원을 산책했다. 점심때여서인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한손에는 테이크아웃 음료를 들고 무리지어 걷거나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 더없이 여유로워보였다. 예전 내가 근무했던 회사는 양재천 근처에 있었고, 벗꽃이 만발한 4월이면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여기 공원에 있는 이들도 그럴까.. 한낮 햇살을 즐기려 서둘러 점심을 먹고 나왔을 부지런함이 전해졌다.
공원은 얼마전 (아마 1년 전쯤?) 공사를 마치고 문을 열었다. 현상설계를 할 때부터 눈여겨봤었고, 당선된 건축가가 실력있는 분이어서 공원이 어떻게 새로 바뀔지 내심 기대를 했었다.
건축가의 스타일대로 공원은 차분하면서도 친근했다. 들어가는 곳을 넓게 열어두면서도 나무와 풀을 양쪽으로 배치해 약간의 몰입감을 주었고, 큰 도로에서 맞대어 들어가는 공원이기에 지나다니는 자동차소리가 멀리까지 울리는 문제 - 꼭 '문제'는 아니지만 공원 옆 철길에서 간간히 울리는 기차 지나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 도 식생과 공간배치를 통해 원활하게 분위기 전환을 이뤄내었다. 덕분에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빠르게 움직이는 도심 한복판에서 익히 경험하기 어려운 정적인 분위기에 감싸이게 된다. 근린공원이 아닌 선교를 하다 죽임을 당한 이들을 기리는 공원이기에 이런 장면전환이 경건하고 시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듯 느껴졌다. 건축가가 (아마도) 의도한 공간연출인듯 하다.
공간은 잘 설계되었는데, 그에 반해 건물의 마감은 아쉬운 곳이 좀 있었다. 특히 벽돌을 쌓아 마감을 한 건물의 벽면이 많이 아쉬었다. 조적공사의 생명은 면의 평활도와 수직수평인데, 잘 안되어 있다보니 벽돌면에 불규칙한 그림자가 생겼다.
디테일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직은 모르는 공정에서부터 디테일이 따져진다. 모르고 보이지 않기에 지나치는 많은 공정이 마감때가 되면 도드라져 나타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현장은 햄머드릴 소리와 고성으로 가득차곤 한다. 해야할 때 잘 해두지 않으면 가래로도 못 막는 것이 물막이만은 아니다. 자칫 마감공사하면서 골조부터 손을 대야 하는 경우가 있고 그러다보면 큰일이 아닌 잔일에 치여서 공사 마무리를 못하게 기진맥진 하게 된다. 마치 눈 앞에서 파국을 맞는 어떤 관계나 일을 돌이켜 살펴보면 이면에 해야할 때 해두지 않았던 작은 일들이 놓여있곤 한것처럼.
마음을 얻어야만 일이 잘 진행되는 건 연애만이 아니다. 공사현장에서 실제로 물성이 있는 재료를 손으로 만져서 제위치에 놓고 붙이고 쌓고 조이고 칠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술자 또는 작업자이다. 혹은 아저씨, 사장님, 여기요, 저기요 등등으로 부르는.. 건물은 결국 그들의 손으로 건물은 지어진다. 그들이 손을 좀 더 정교하게 움직이게 하는 건 그들의 마음이고, 그들의 세심한 마음은 정확한 일당 지급으로부터 나온다. 공사를 서두르면 더 많은 이윤이 남는다. 반대로 공사를 서두르면 작업자의 몫은 줄어든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하도록 하면, 작업자는 마음을 담아 일할 여력이 없어지고 자연히 손은 거칠어진다. 작업자의 선한 마음은 이용하고 이기적인 마음은 타박한다. 거칠어진 손으로 쌓은 벽돌은 면이 평활하지 않고 수직과 수평, 줄눈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공정. 마음을 얻는 공정이 없는 탓이다.
이제 다른 공정이 들어왔다. 이용하거나 활용했던 조적공은 떠났다. 금속공사를 할 차례이다. 두겁의 생명은 물이 옥상 안쪽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약간의 기울기를 둬서 비가오거나 이슬이 내리면 그 물이 외벽면으로 타고 흐르지 않고 옥상 안쪽으로 흘러서 우수관을 통해 바깥으로 배출되도로 해야한다. 여기서 관건은 '약간의 기울기'다. 도면으로는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작업자가 감으로 해야 한다. 감이라... 역시나 작업자 마음의 문제이다. 두겁을 금속재로 하면 길게 한면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조각낸 금속 후레싱을 연결해서 붙여야 한다. 연결부위를 얼마나 정교하게 붙이느냐는... 이 또한... 이어붙이는 부분이 매끄럽지 않으면 그 부위로 물이 고여 흐르는데, 방향마저 외벽면이면 외벽에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 이 땟물은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더욱이 벽돌에 발수제를 도포하지 않았다면 땟물이 벽돌에 스며들어서 지운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디테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게 될 공정에서 이미 디테일의 수준은 결정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에 보이는 디테일만 따지는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말과 글, 이미지로 표현되는 시지각적으로 전달되는 디테일을 따지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언컨택트한 세상에서, 우리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디테일에 민감해지고, 그만큼 더 예민해지는 건 아닐까. 하지만 세상은, 그리고 관계란 보이지 않는 것들로 더 깊이 맺어지는 경우가 많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것. 보여주지 않아도 이해하는 것 등등. 우리가 불통을 겪는 것은 말과 글이 정확하지 않아서가 아닌, 보여주는 이미지가 부족해서가 아닌 그 이면의 정서적 공감을 얻기위한 공정이 디테일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글을 쓰면서도 나는 이런 생각을 늘 한다. 글의 효용과 무용 사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