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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여행에서 배운 느림이란–왜 우리는 서두르는가

7시간 인도 기차 연착은 양반이다

인도는 기차 연착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1~2시간 기차를 기다리는 것은 연착도 아니라도 한다. 10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나는 인도에서 기차가 연착되었어"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나도 이러한 악명 높은 것을 겪어본 적이 있다. 2010년에 인도 여행을 할 때였다. 나는 라자스탄의 우다이푸르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고 오후 2시에 도착하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미리 기차표를 사놓고 출발일 30분 전에 철도역에 도착했다.


지금이야 앱으로 간단하게 예매를 할 수 있지만, 2010년쯤에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었다. 그때는 미리 하루 전에 기차역에 가서 표를 예매해야 했다. 혹은 시내 여행사에 수수료를 내고 예매 대행을 부탁했다. 기차역에서는 역무원이 기차 출발 전에 해당 승객의 이름을 출력해서 플랫폼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여행자들은 대륙의 모든 기차 시간표를 나타내는 200페이지 남짓한 '기차 시간표 책'을 사서 들고 다녔다. 땅이 워낙 넓다 보니 기차의 종류도 많고 시간대도 다양했기 때문이다.


오후 2시에 오기로 한 기차는 10분, 20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설마 늦겠어?” 하며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3시, 4시.. 시간이 점점 흐르기 시작했다. 역무원에게 물어보았지만 '노 프러블럼. 웨이트'라고 말할 뿐이다. 근처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손만 갸우뚱한다. 하지만 내 주변의 현지인들은 달랐다. 돗자리를 깔고 앉아 차이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은 역 플랫폼에서 뛰어놀았고, 어떤 가족은 아예 도시락을 꺼내 먹으며 소풍을 즐기듯 시간을 보냈다. 5시, 7시… 결국 밤 9시에야 기차가 들어왔다. 무려 7시간 대기였다. 1~2시간 늦겠지 생각을 했는데 무려 7시간이나 늦은 것이었다.


주위를 보니 바쁜 사람은 나 혼자였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도 없고, 호텔 예약도 되어 있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조급했던 걸까? 사실 인도에서 7시간 연착은 양반이라는 것. 어떤 여행자는 하루 종일 기다리기도 한다. 인도의 기차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철도망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늦는 것도 일상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크게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그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잠시 멈춤의 시간을 즐긴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내가 조급해했던 건 외부 상황이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시간에 쫓기는 습관 때문이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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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 간다

한국의 국가번호는 82다. 누군가 농담 삼아 묻길래 나는 이렇게 답했다. 대한민국 국가번호가 82인 것은 빨리빨리이기 때문이에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장 빨리 배우는 단어 중 하나가 ‘빨리빨리’라는 말은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실제로 내가 만난 외국인들 중 몇몇은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빨리빨리'라고 우스면서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원래 한국이 이렇게 ‘빠른 나라’였을까?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그때 사람들은 “점심 무렵에 만나자”처럼 느슨하게 약속을 잡았다. 농경사회에서는 계절과 날씨가 시간의 기준이었고, 하루의 리듬은 해가 뜨고 지는 데 맞춰 흘렀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간은 곧 돈이 되었다. 늦는 것은 손실이 되었고, 효율과 속도가 미덕이 되었다. 마치 더 빨리 달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에 들어선 것처럼.


오늘날 독일은 ‘시간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나라’로 유명하지만, 중세 기록을 보면 게르만인들은 약속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느긋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게으른 게르만 놈들'이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시간에 대한 태도는 문화와 경제 구조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산업화는 사람들의 시간에 대한 인식도 바꿔 놓는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90년대에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집에 전화기만 있었지만 친구들과 약속을 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토요일 오후 1시에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라고 미리 서로 말을 해놓으면 10~20분 정도 늦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카톡으로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1분 1초를 아주 크게 생각한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뿐만 아니라 문화계에서도 나타났다. 예전에는 화가들이 그림을 자연을 정확히 모방하였다. 하지만 산업화로 기계가 시간을 단축시키고, 도시의 생활이 속도를 요구하면서, 이 또한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천천히 사물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이 미덕이었다면, 이제는 순간의 인상, 스쳐 지나가는 감각을 포착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인상주의였다.




왜 우리는 이렇게 빨리 사는가

빠름은 한국의 단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강력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K방산이 유명한 이유 중 하나가 납기를 철저히 지킨다는 점이다. 체코 원전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들은 공사 기간이 지연되는 경우가 흔하지만, 한국은 과거 UAE 바라카 원전을 제때 완공한 경험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빨리빨리’ 문화는 국내에서는 조급함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속도와 약속을 지키는 능력이라는 강점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현상은 양날의 칼처럼 양면성이 있다. 일반 회사는 아직도 야근과 주말 근무가 많으며, IT 업계에서는 ‘야근은 기본’이라는 농담이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사교육에 시달리며 ‘남들보다 빨리’ 앞서가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의료 현장 역시 ‘빨리빨리’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진료 시간이 짧다 보니 환자와 충분히 소통하기 어렵다. 당일배송은 소비자들에게 '빠른 편리함'을 주었지만, 배달 기사들은 과로사에 시달리고 있다. 음식 배달 플랫폼 역시 고객의 만족도를 위해 ‘30분 내 도착’을 강조하지만, 결국 그 부담은 라이더들에게 돌아가 사고와 피로로 이어진다. 이처럼 ‘빠름’은 한쪽에서는 경쟁력과 효율을 낳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부작용을 만들기도 한다.


경쟁과 속도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더 크게 진행되는 듯하다. 왜 이렇게 한국은 빨리빨리를 외치는 걸까? 그 이유는 성격이나 기질 때문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지나온 역사적 배경에 뿌리에 있다. 한국은 1950년대 전쟁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지독한 가난과 기아을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속도였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 걸릴 일을 10년 안에 해내야 했고, 공장과 건설 현장은 밤낮없이 돌아갔다. 새마을 운동, 포항제철 건설, 고속도로 개통 같은 것은 모두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도 그랬다. 구조조정과 개혁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한국의 ‘빨리빨리’는 단순한 생활 습관이 아니라, 역사가 만든 집단적 DNA라고 할 수 있다. 늦으면 뒤처진다는 두려움이 모든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느림을 추구한다고 하면, 자칫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보이거나, 심지어 게으른 사람으로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약 10여 년 전부터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조건 속도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인식이 나타났다. 또한 끊임없는 속도 경쟁 속에서 지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슬로 라이프’ ‘워라밸’ 같은 단어들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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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산업화 시대에는 노동력 투입이 곧 생산량으로 직결되었다. 하루 12시간, 혹은 그 이상을 투자하면 그만큼 결과가 나왔고, 사람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이 곧 성과였다. 공장과 건설 현장에서 땀 흘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부지런함=성공’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현대 사회는 정보와 기술이 생산의 핵심이다. 단순히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효율이 올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비효율적인 속도 경쟁이 스트레스와 번아웃을 일으키고 창의성을 방해한다.


창의력은 무조건적인 근면과 성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딴생각을 할 때 나오는 경우가 많다. 구글은 직원들에게 근무 시간의 20%를 본인이 관심 있는 프로젝트에 자유롭게 투자하도록 허용했다. 이 정책에서 Gmail, Google News 등 혁신적 서비스가 탄생했다. 즉, 강제적 근면이 아닌 ‘시간적 여유’가 창의성을 촉진했다. 스웨덴의 일부 기업은 6시간 근무제를 실험했는데, 근로자의 만족도와 생산성이 모두 높아졌다. 덜 일했지만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많이 일하는 것’이 곧 ‘잘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게으름”은 단순한 나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여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하루 5시간만 일해도 모두가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 현실은 정반대다.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삶은 오히려 더 바빠졌다. 우리는 더 적게 일하기보다, 더 많이 일하며 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예전에 유럽에서 어학연수를 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한 달 과정으로 온 스페인 친구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온 거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휴가 기간 동안에 왔어"라고 했다. 내가 휴가가 얼마나 물어보니 한 달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사정을 말해주면서 부럽다고 하는 나에게 그는 덧붙였다. “나는 휴가가 한 달 뿐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두 달이야.”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여유 있는 유럽의 생활 때문에 미국보다 경제가 뒤처졌다고 말한다.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가 지탱해줘야 하는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서 "덜 일하자" 라는 말은 이상주의자말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경제성장이 정말 인류 최대의 목적일까? GDP 수치가 곧 행복을 보장하는가? 미국 방식의 끝없는 경쟁과 장시간 노동이 과연 더 나은 삶을 보장하는 것일까?


지금도 가끔씩 인도에서 7시간을 기다리던 그날을 떠올린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시계를 보지 않았고, 늦는 기차를 탓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그 시간 속에서 웃고, 이야기하고, 차 한 잔을 나누었다. 그 느림 속에는 여유가 있었다. 한국의 빠름은 분명 놀라운 힘이다. 하지만 그 속도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잊을 수도 있다.


한국 사회도 조금씩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제, 주 4일제 논의, ‘워라밸’이라는 말은 금방 끝나는 유행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역마다 ‘슬로 시티’를 지향하는 곳들이 늘어나고, 잠시 멈춰 서는 삶을 실험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4차 인공지능 혁명이 일어나는 요즘, 우리는 이제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보다 “얼마나 행복하게, 얼마나 인간답게”를 다시 묻고 선택해야 하는 시대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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