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태국에 4년째 살고 있다. 그전에는 라오스에서 2년 동안 살았다. 라오스에서 살 때는 국제 봉사단으로 수도 비엔티안에 파견되었고 현지어를 배우며 현지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태국에서는 한 작은 한국 회사에서 일을 했다. 흔히들 동남아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대기업 주재원을 생각해서 집에 가정부가 있다든지 고급 아파트에 산다든지 하는 것을 생각하지만, 나는 그런 여유로운 삶이 아니었고 오히려 급여가 한국보다도 약간 더 적었다. 그래서 매달 나가는 금액을 제외하면 수중에 돈이 얼마 없어 매우 빠듯한 생활을 했는데, 오히려 덕분에 두 나라의 진짜 일상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라오스와 태국의 모습을 살펴보자
라오스는 네팔, 몽골과 같은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라서 대부분의 물자가 태국이나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등 무역이나 산업 면에서는 제약이 많다. 베트남과 더불어 동남아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은둔의 나라였다. 그 때문일까, 이곳은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시간도 참 느리게 흐른다. 사람들은 천천히 걷고, 대화는 조용하고,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하다. 라오스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는 어떤 것이 어울릴까? '착하다'라는 말은 너무 광범위하다. '순수하다'라는 말도 맞지 않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순박하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거짓이나 꾸밈이 별로 없고 수수하다. 인정도 두텁다. 상대방에게 큰 소리 내는 걸 무례하게 여기고, 도로에서는 경적조차 잘 울리지 않는다. 만약 라오스를 여행하면서 불필요하게 경적을 울리는 차량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시간의 흐름도 개발도상국이 으레 그렇듯 이들도 마찬가지인데,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 건 큰일이 아니다. '저녁 7시에 만나자'라고 하면 6시 50분이 되어야 천천히 집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만약 오후 4시에 만나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오후 3시에 만나자고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급할 게 없는 사람들. 한국인들만 답답할 뿐이다.
그들의 이러한 성향은 종교에서 온 영향이 크다. 라오스는 상좌부 불교, 소위 ‘소승불교’를 믿는다. 현재에 만족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의 인생은 날카롭지가 않다. 나처럼 번잡한 도시에 지친 사람에겐 이런 분위기가 참 위로가 된다. 물론 모든 게 낭만적인 건 아니다. 행정은 느리고, 서비스는 더디고, 인터넷 속도조차도 마음처럼 느긋하다. 시간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답답할 수 있는데 특히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느리고 불편하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그들처럼 느긋해지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된다. 즉 이곳만의 여유는 그 모든 불편을 감싸줄 만큼 특별하다.
라오스는 원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4년쯤인가. 한국의 한 예능에서 '꽃보다 청춘'이라는 방송 이후 라오스는 한국인들의 폭발적인 인기 여행지가 되었다. 마침 한 여행가이드북에서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로 선정되었다고 광고를 하였다. (사실 뉴욕타임스가 진짜 그 보도를 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는 방비엥에서는 낮에 튜빙을 하고 밤에는 사쿠라바에서 몸을 흔들며, 루앙프라방에서는 고요한 사원을 거닐면서 인증샷을 찍어야 청춘의 표적이라고 불렸을 때이다. 지금은 라오스는 이미 한 번쯤 가볼 만한 사람은 가본 여행지가 되었고, 한국인들의 아지트라는 것도 경기도 다낭이라고 하는 베트남 다낭에게 넘겨준 지 꽤 됐지만, 아직도 꾸준히 인기가 있는 여행지이다.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조용한 비엔티안, 티비 방송 이후 인기를 끈 액티비티의 도시인 방비엥, 아름다운 사원이 많은 고즈넉한 한국의 경주와 같은 루앙프라방, 이 외에도 남쪽의 4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씨판돈, 북부에는 여러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루앙남타, 비엥싸이, 쌈느아 등 다양한 도시들이 있다. 예전에 라오스에 있을 때 '라오스는 태국의 조용한 지방 도시 같다'라고 말을 했는데, 현지인 친구가 반색하면서 '아니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 라오스는 보급형 태국이나 마이너 버전의 태국이 아닌 '라오스' 그 자체인 것이다.
태국은 라오스와 문화적 뿌리를 공유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온 나라다. 라오스와 태국이 동남아 대륙에 뿌리를 내린 것은 비교적 늦은 8세기~13세기 무렵으로, 중국의 윈난성에서 건너왔다. 그 전에는 현재 캄보디아인 크메르인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타이족과 라오족은 언어‧문화‧기원을 공유하는 형제 민족이지만 근대 국가 형성 과정을 거치며 각기 다른 민족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식민지배를 받았던 동남아시아 다른 국가와 달리 태국은 유일하게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자국민들의 높은 프라이드를 갖게 해 주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한 일본의 생산기지로서 많은 이점을 누렸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보다 잘 살았고 방콕은 아시안 게임을 무려 4번이나(1966년, 1970년, 1978년, 1998년) 개최하였다. 그러나 고부가가치 산업 전환에 실패하고 잦은 쿠데타 등 정치적인 불안 등으로 지금은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대표적인 국가가 되었다. 실제로 태국을 여행하다보면 태국 자체 브랜드 상품은 대부분 1~2차 생산물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오랫동안 누렸던 동남아시아의 패자의 자리도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 빼앗기게 된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경제는 정체되어 있지만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살기에는 꽤 괜찮은 곳이다. 태국의 도시 분위기와 생활 인프라는 라오스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웬만한 도시는 물론 지방에도 센트롤이라는 백화점이 다 하나씩 있으며 시골 구석구석 세븐 일레븐 편의점이 있다. 방콕 같은 대도시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되어 있고, 중소도시들도 제법 잘 갖춰져 있다. 지방 대도시에는 쇼핑몰과 병원, 은행, 대중교통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 장기 체류자나 외국인에게도 익숙한 시스템 덕분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음식도 다양하고 풍부하다. 길거리 음식부터 고급 레스토랑까지 선택지도 넓고, 무엇보다 가격이 부담 없다. 치안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 밤늦게 산책하거나 야시장에 가는 것도 큰 걱정이 없다.
단점도 있는데 오랜 관광 산업의 역사 탓인지 일부 지역은 너무 상업화됐고, 사람들도 예전보다 다소 계산적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특히 방콕처럼 외국인이 많은 지역에서는 ‘현지인과 어울린다’는 느낌보다는 외국인을 위한 삶이 따로 굴러간다. 30년 전에는 아마도 라오스 인들처럼 '순박하다'라는 말이 어울렸을 듯하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회다. 태국은 라오스보다 훨씬 역동적인 곳이다. 일하고 싶다면 일할 기회가 있고, 쉬고 싶다면 쉴 수 있는 공간도 많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싶은 사람에겐 이보다 더 나은 선택이 있을까 싶다.
태국의 수도인 방콕은 미식, 쇼핑, 식도락, 나이트라이프, 휴양 등 모든 여행자들을 만족시키는 곳이다. 어디에 여행 갈지 모르겠다면 방콕으로 오면 절반은 성공이다. BTS라고 불리는 지상철은 도시 곳곳을 빠르고 쾌적하게 연결한다. 또한 방콕에서 불과 2시간만 가면 유명한 휴양지인 파타야가 있으며, 북부에는 북부 도시로 한적한 분위기와 전통문화가 어울려진 치앙마이가 있다. 남쪽에는 태국 최대의 섬이자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푸켓이 있으며, 자연 그대로의 절경이 인상적인 해양 휴양지이자 조용한 해변과 섬들로 유명한 끄라비가 있다. 이외에도 치앙라이, 난, 꼬사멧 등 수많은 관광지와 볼거리가 있는 곳이다.
라오스는 조용하고 단순한 삶을 원하는 사람, 순박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휴식을 찾고 싶은 사람. 도시의 소음보다 새소리가 어울리는 곳에서 살고 싶은 이들에게 어울린다. 만약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방송을 좋아한다면 여기가 딱 어울린다. 다만 수도에도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불편할 수도 있다. 라오스어를 배워보려고 해도 지렁이 같은 글자를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현지어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현지인과 자연스럽게 합석하면서 맥주 할 수 있는 곳이 라오스이다. 워낙 최빈국을 오랫동안 했었던 곳이라 매년 7% 씩 발전하는 등 현재 경제 성장률도 높다.
태국은 편의와 자유를 동시에 누리고 싶은 사람. 외국인으로도 불편함 없이 지내고 싶은 사람. 일상도 중요하지만 주말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태국이 정답이다. 방콕공항은 동남아의 허브라서 다른 곳으로 여행 가기도 편하고 비행기삯도 저렴하다. 대도시에서는 영어도 비교적 잘 통한다. 적은 돈으로도 적당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디지털 노마드는 물론 은퇴 이민지로서도 가장 적당하다. 태국 정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엘리트 비자'라는 것을 만들었다.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3천만 원 정도라면 5년 동안 VIP 공항 서비스, 이민 지원, 프리미엄 라운지 및 전용 통로 이용 등 여러 가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만약 어느 곳이 더 좋은지 선택할 수 없다면, 태국 농카이에 머물도록 하자. 라오스 국경과도 가깝고 인근 1시간 거리에는 우돈타니 국제공항도 있다. 보름은 라오스에, 보름은 태국에 머물면서 각기 다른 환경에서 지낼 수 있다.
- 2024.06.20.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