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은 동남아는 물론 전 세계를 기준으로 봐도 여행할 곳이 많은 곳으로, 항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TOP10에 드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4년 일했으니 남들은 돈을 주고 일부러 여행을 온다고 하는데, 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받으면서 있었으니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태국에 온다고 하면 방콕의 활기찬 거리, 푸껫의 해변, 치앙마이의 올드타운을 떠올린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태국의 어디를 여행하면 좋을까요?”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방콕, 푸껫, 치앙마이를 추천할 것이다. 하지만 태국에 1년 이상 거주하는 분이 “어디가 진짜 좋을까요?”라고 묻는다면 빠이(Pai), 난(Nan), 치앙라이(Chiang Rai)를 권한다. 만약 "남들이 다 가는 곳 말고 태국의 숨겨진 여행지는 어디예요?"라고 묻는다면, 조용히 치앙다오(Chiang Dao)나 므앙러이(Mueang Luang)를 추천한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중에서도 치앙다오다. 이곳을 여행했던 건 2021년 9월. 벌써 4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공기와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게 내 안에 살아 있다. 그 무렵은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멈췄던 시기였다. 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락다운으로 인해 저녁 8시 이후엔 외출이 제한됐고, 도시 전체가 마치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그러다 2021년 하반기,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국내 여행이 허용됐다. 그렇게 나는 다시 여행자의 본능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 시기에는 태국처럼 관광수입이 높은 나라는 큰 타격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지만, 삶은 각자의 방식대로 계속되고 있었다. 외국인으로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관광객이 거의 없던 그 시기 덕분에, 나는 태국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붐비지 않는 거리, 조용한 사원, 낮아진 물가. 그 모든 것들이 나만의 태국을 만들어주었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조용한 마을, 치앙다오. 인구는 9만 명 남짓이지만, 여행자가 머무는 중심지는 훨씬 더 작다. 이곳에는 태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 ‘도이 루앙 치앙다오(Doi Luang Chiang Dao)’가 우뚝 솟아 있다. ‘치앙’은 도시, ‘다오’는 별. 이름 그대로 ‘별의 도시’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진 곳이다. 낮에는 산 안개에 덮이고, 밤이 되면 별빛이 쏟아진다. 땅 위에 누운 채, 우주와 맞닿는 기분이랄까.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발품이다. 치앙다오로 가려면 우선 치앙마이 버스터미널로 가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지방 도시가 늘 그렇듯, 이런 곳은 인터넷보다 현장에서 직접 시간표를 확인하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 더군다나 그때는 코로나 시기라 하루 다섯 편 운행하던 버스가 두세 번만 다니는 상황이었다. 나는 전날 미리 터미널에 들러 시간표를 확인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버스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고,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버스는 90년대 한국에서 으레 보였던 낡고 시끄럽고 에어컨이 없는 것이었다. 약 2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치앙다오 버스터미널. 거기서부터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됐다.
지도상으로 숙소까지는 약 1시간 반 거리. 뚝뚝 기사들이 호객을 했지만, 이 지역엔 그랩이 없었고, 일일이 흥정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터미널 근처 시장에서 쌀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걸음을 옮겼다. 1시간 반쯤 걷는 게 뭐 대수랴. 어차피 여행이란 원래 ‘고통’을 의미하던 단어였다. 여행(travel)의 어원은 고통을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 travail이다. 옛날엔 산적을 만날 수도, 호랑이를 마주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많이 편해졌지만, 여전히 ‘집 나서면 고생’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차비도 아끼고 다리 근육도 사용하면서, 주변 현지인들과 가볍게 눈인사를 할 기회도 생긴다.
가는 길에 꼭 들러야 할 명소가 하나 있다. 바로 왓 탐 파 플롱(Wat Tham Pha Plong) 사원. 숲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바위산 속 동굴에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계단 아래에는 호수가 있고, 동굴 안에는 작은 불상들이 놓여 있다. 동굴 속은 시원해 땀을 식히기 좋고, 은은한 종소리와 숲의 바람, 마주치는 승려들의 미소가 마음을 차분히 만들어 준다. 걷는 여행의 장점은 천천히 주변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뚝뚝을 탔다면 이 풍경을 그냥 지나쳤겠지.
한참을 걸어 목적지 부근에 도착했다. 여러 개의 숙소들이 언저리 보이는데 내가 머무는 곳은 나무로 지어진 작은 방갈로였다. 방 안에는 침대와 옷걸이, 간단한 서랍이 전부. 에어컨도 TV도 없고, 화장실은 공용으로 써야 했지만, 코로나 시국에 손님은 나 혼자(?)라서 불편하지 않았다. 커튼을 걷고 작은 창문을 열면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새소리,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에서 새소리를 들은 게 언제였더라. 문득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은 우리가 흔하게 들었던 자연의 소리가 ‘ASMR’이라는 이름으로 앱을 통해 일부러 들어야 하는 세상이니까. 사람들은 장작불 타는 소리, 귀뚜라미 소리, 빗소리를 들으면 안정을 느끼고 잠이 잘 온다고 한다. 반면 위층에서 나는 발소리나 옆방의 속삭임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준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수백만 년의 진화가 우리 몸에 새긴 흔적 때문이다. 개구리나 귀뚜라미 소리는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오히려 그 소리가 들린다는 건, 근처에 포식자가 없고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편히 눈을 감고 잠을 잘 수 있었다. 반대로 인간의 발소리나 속삭임은 ‘몰래 접근하는 존재’로 인식되어 뇌는 즉각 경계를 높인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몸은 여전히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내가 치앙다오에 머문 시기는 9월, 우기의 초입이었다. 다행히 비는 그치고, 근처를 산책할 수 있었다. 방콕과 같은 복잡함이 없었고 파타야와 같은 번잡함이 없어 도시에서는 사치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이 이곳에선 마치 공기처럼 당연했다. 걷고, 밥을 먹고, 쉬다가 밤이 되었다. 이 도시의 진짜 아름다움은 바로 그 밤에 드러났다. 해가 지고 나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순간 말을 잃었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하늘에 가득 박혀 있었다. 일부러 기대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선명하고 찬란한 별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치앙다오—별들의 도시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숨을 죽인 채, 나는 한참을 바라봤다. 내가 이렇게 많은 별을 본 게 대체 언제였나. 아마도 5~6년 전에 한국의 어느 시골 마을,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그곳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하늘을 가득 메운 수많은 별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별도 사람처럼 태어나고 죽는다. 우주에 떠다니는 가스와 먼지가 중력에 이끌려 뭉치면 별이 생기고, 크고 뜨거운 별은 수명이 다하면 거대한 폭발, 즉 초신성을 일으키며 사라진다. 작고 오래 사는 별은 천천히 식으면서 백색왜성으로 변한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별빛은 실제로는 아주 오래전에 그 별에서 출발한 빛일 수 있다. 어떤 별은 이미 사라졌는데, 우리는 아직 그 빛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100년 남짓한 우리의 삶에게 인간이 하루살이를 바라보듯, 별들도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저 별들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어쩌면 저 멀리 다른 누군가도 지구를 바라보고 있을지도.
우리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당연한 것들을 자주 놓치고 산다. 옛날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길을 찾았지만, 지금 우리는 내비게이션 없이는 어디로도 쉽게 가지 못한다. 기술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줬지만, 예전부터 몸에 배어 있던 생존 감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도시에서 별을 보는 일은 이제 사치에 가깝다. 특히 서울 같은 대도시에선 밤하늘조차 또렷이 보기 어려워, 별을 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어 멀리까지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예전엔 일상 속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던 별빛이, 지금은 돈과 시간을 들여야만 볼 수 있는 귀한 장면이 돼버린 것이다.
요즘 여행은 몇 분짜리 숏폼 영상처럼 빠르게 보고 찍고 떠난다. 하지만 치앙다오는 나에게 '느림의 미학'을 다시 느끼게 해 주었다. 여유 있게 걷고, 천천히 머물며,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치앙다오에서의 1박 2일은 짧았지만 오래 남았다. 귀뚜라미 소리 하나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새소리에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은 내게 잊고 있던 감각을 다시 일깨워줬다. 그래서 누군가 '태국의 숨겨진 여행지가 어디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치앙다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날 밤, 치앙다오의 별들 아래서 조용히 흐르던 시간을 떠올리며.
-2025.06.17.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