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나마 사랑했던 나의 회사에게
조용한 퇴사는 섹스리스 부부와 같다.
마음은 떠났지만 몸은 떠나지 못하는 상태니까. 한때나마 서로를 강하게 원했고, 그래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계약까지 맺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제 더이상 서로를 원하지 않음에도 그 계약을 파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은 계약 파기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여기에는 경제적 비용은 물론 평판과 같은 사회적 비용도 포함된다)이 계약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크기 때문이리라.
남은 건 껍데기뿐인 관계다. 그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차라리 그래서 편한 것도 있다. 철저하게 계약에 의한 관계라면 불필요한 에너지와 감정의 소모를 막을 수 있을테니까. 이 경우에는 오히려 감정이 남아 있으면 곤란하다. 질척거리는 건 어떤 관계에서든 최악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게 늘 문제다.
널 위해서가 아니야, 날 위해서지
조용한 퇴사를 결심하면서 필요 최소한의 업무만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일이 손에 들리면 또 적당히하고 넘기지를 잘 못한다. 그러다보면 시키지 않은 야근도 하고 그런다. 야근이라니? 조용한 퇴사를 지향한다면서 이 무슨 모순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건 내가 완벽주의자라서도, 아직 회사에 기대와 미련 혹은 애사심 따위가 남아 있어서도 아니다. “회사에서는 최대한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직 유효하다. 그러니까, 그 야근 또한 내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선택이다. 일을 제 시간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또한 나에게 스트레스가 되니까. 실제로 대충 치워놨던 일이 스노우볼이 되어 되돌아오는 게 끔찍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조용한 퇴사지 태업이 아니다. 그 둘은 엄연히 다르고, 태업은 스스로 나의 가치를 낮추는 일이다. 비록 회사가 내 업무와 나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 자신까지 나를 낮잡아 보고 싶지는 않다. 책임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고, 불성실한 사람으로 기억되기 싫다.
하지만 그런 책임감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필요 이상으로 업무에 몰두할 때가 종종 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정성을 들이기도 한다. 그럴 때면 과연 내가 조용한 퇴사를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다.
그러므로 나는 조용한 퇴사 상태에 있는 것이 맞다.
조용한 퇴사가 실제 퇴사로 이어질까?
섹스리스를 이혼의 전 단계로, 조용한 퇴사를 실제 퇴사의 전조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조용한 퇴사를 결심한 나도 언젠가는 퇴사를 하게 될까? 나는 지금 퇴사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든 회사 일보다는 다른 일(글쓰기)에서 재미와 보람을 찾으려 노력 중이니까. 내가 좋아하고 재밌어 하는 일을 하면서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때려칠 것이다. 그게 안 되니까 문제다.
섹스리스 부부에게도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 있듯이, 조용한 퇴사자에게도 일에 대한 욕구가 있다. 일을 통해 성취감, 자아실현, 타인의 인정 등을 얻고 싶다는 욕구가. 조용한 퇴사는 그런 욕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관계에서는 그것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껍데기뿐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거다.
물론 관계가 회복될 여지도 남아 있다. 아직 완전히 갈라선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조용한 퇴사를 그만둘지 아닐지는 이제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 관계회복을 원했던 건 나지, 회사가 아니니까. 반대로 내가 진짜로 회사를 그만둘지 아닐지는 회사가 아닌 나에게 달려 있다. 회사는 나에게 아쉬울 것이 별로 없고, 내겐 아직 회사가 필요하니까.
"Work is not my life"
나와 회사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도, 결국 퇴사를 선택하게 될 수도, 아니면 가능성은 낮지만 회사에서 내가 바라던 자아성취와 인정욕구를 채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되더라도, 한 가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일이 곧 나의 삶인 건 아니다"는 깨달음이다.
일을 통해 성취감, 자아실현, 인정욕구 등을 채우고 싶은 건 맞다. 그러나 그것은 일이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실현시켜주는 수단일 때에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나보다 일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면, 나는 일의 노예가 된다. 그러므로 조용한 퇴사는 내 삶의 주도권을 일에게, 회사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선언이다. 비록 먹고 살아야 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앞에서는 많은 것을 내려놔야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