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일주일에 한 번 선생님들과 교수님과 함께하는 세미나를 마치고 나오면서, 학교 정문을 향해 내려가는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나도 모르게 저절로 경쾌하게 내디디면서, 한 발에 한 호흡 놀이하듯 건너뛰며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면서, 문득 이런 정도의 마음, 이런 정도의 생활만 나에게 유지될 수 있다면, 나는 그 정도만으로도 무척이나 만족해하며 감사해하며, 앞으로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을 텐데…,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하루가 어떤 특별한 날이었던가, 그날 하루에 어떤 대단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상황으로만 따지자면 도리어 그리 괜찮다 말할 수는 없는 나날이었다. 내 삶의 복잡함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내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 답답한지, 어떤 사람들은 공감할 수도 어떤 사람들은 대수롭지도 않게 여길 수 있을, 그런 요소들을 줄줄 늘어놓으며 극적으로 과장하거나 애써 설득시키고자 하고 싶진 않고, 다만 스스로 느끼기에 참으로 만만치 않다 싶은 나날들이었다.
한 해 한 해 세월은 흘러가고 나이는 들어간다. 부모님께선 사회적으로 내 나이쯤이면, 본인 친구들 자녀들이 대개 그러하듯, 본인 생각에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싶은 사회적 관문들을 내가 차근차근 남들처럼 통과해 나가길 바라시지만, 전혀 그러할 생각 없고 전혀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나와는 어쩔 수 없이 갈등이 벌어진다. 사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문제라서 그런 갈등에 대해서는 대처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다. 그저 그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래도 그때그때 기분은 상하니까 같이 짜증도 좀 내다가, 다시 또 견디고 풀어가며 언젠간 내 뜻이 관철되겠지, 내 삶을 사는 건 나이고, 다른 누구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는 건 너무나 명확해서 결국엔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로 대처하기에 까다로운 문제가 남아있는데, 그건 바로 역시 내가 나 자신을 향해, 나에 대하여 던지는 고민들이다. 지금 이대로 괜찮을 걸까,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 걸까…. 이러한 고민들이 제대로 한번 세차게 몰아칠 때는 그 쏟아지는 막막한 비바람에 발 디딜 곳마저 없는 것처럼 표류한다. 지금의 내 처지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선 한 치 앞도 더 나아갈 수 없을 듯한 답보 상태이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가고 기한은 줄어들며, 내가 몸담고 있어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해선 하루하루 복잡하고 번잡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더욱더 시간과 신경을 빼앗기며 도무지 적절히 몸을 뺄 수는 없게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 일들을 같이 한번 잘 해내 보겠다 시작한 것은 나 자신이었고, 그래서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그 어느 하나라도 잘 되어가는 게 없는 듯하며, 특히나 답보 상태를 돌파하여 그 어떤 결과물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괴로움에 짓눌릴 때는 마음이 너무도 주저앉아 버린다. 어디로 무너지는지도 모르게 가라앉으며 잔해에 뒤덮여버린다. 그런데 그날 세미나를 마치고 계단을 한 발 한 발 건너뛰며 내려오던 그 순간 내 마음속에 차오르던 생각은, 그래 이 정도도 그리 나쁘진 않다, 이 정도가 내 속도라면 조금은 늦어 보여도 그에 맞춰 성실히 걸어가자, 그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 라는 것이었다. 내 앞에 놓인 두 가지 일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한쪽 편에서만 바라보며 그 성취만으로 따지기보다, 나는 그 두 가지 일 모두를 다 해내고 있다, 양편을 동시에 바라보며 균형을 잡고 스스로를 대견히 여기며 다독이면서 말이다. 부디 나만의 그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더라도 정말 필요한 때는 맞출 수 있는 그러한 정도의 속도이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