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그날도 여러 지친 일들이 있어 다소 저조한 기운으로 세미나에 참석했었지만, 그래도 여러 좋으신 선생님들과 교수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들, 흥미로운 대화 나누며 조금씩 힘을 얻긴 했었다. 마치고 나오며 다시 집의 일들이 걱정돼 부모님께 각각 전화하며 걸으며 정신 놓고 있다가, 순간 버스 시간이 급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30분 간격의 시외버스고, 놓치면 저녁 일정이 너무 많이 흐트러져 버린다. 그때부턴 마음이 조급해져 달리기 시작했다. 지하철역까지 달리고, 지하철에선 내가 달릴 수 없다 해도 괜히 급한 마음에 서성이고, 지하철역 내려 신호등 건너가서는 또 열심히 바짝 달렸다. 아직은 기온이 다 오르지 않아 땀날 일도 별로 없는 날씨였지만, 땀이 흠뻑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저기 시외버스가 코너를 도는 게 보였고, 정류장까지 얼마 안 남았었기에, 탈 수 있다, 다행이다 싶은 생각에 마음이 너무나 고조되며 더욱 신나게 달렸다. 급하게 표를 끊어 버스 좌석에 앉고 나서는 줄줄 쏟아지는 땀이 닦아도 닦아도 진정되지 않으면서도, 기분은 너무나 좋았다. 간발의 차이로, 타야 했지만 못 탈 수도 있었을, 그 차를 타는 데 성공했고, 그 강렬한 기분에 그날 하루, 또 근래의 다른 모든 마음속 답답함들이 송두리째 다 날아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어쩌면 간발의 차이로 아파트 단지 내 운동시설에, 다시 등록하는 걸 놓쳐버렸다. 뒤늦게 오늘이 마지막 신청일이라는 걸 깨닫고, 굳이 관리사무소를 찾아 꾸역꾸역 올라갔지만 이미 불은 꺼져 있었고 문은 닫혀 있었다. 다음날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시스템상 더는 신청이 불가능하다고. 혹시나 아쉬운 마음에 오후에 다른 직원분께 다시 한번 더 물어봤지만, 대답은 같았다. 그 놓치게 된 간격이 얼마나 긴밀하든 어떠한 사유가 있든, 그래서 얼마나 아깝고 안타깝든, 기한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고, 그러하기에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매달려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어떤 건 그 대열에 간신히 들어설 수 있어서, 그렇게 짜릿하며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간발의 차이로 어떤 건 그 눈앞에서 문턱을 넘을 수 없어서, 그 닫힌 문에 실망하며 이제는 벽이 된 그 냉혹함에 좌절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둘 사이 간격이라 해봐야 간발의 차이 더하기 간발의 차이일 테니, 그 역시 간발의 차이를 크게 넘어선다 할 수는 없을 텐데... 하지만 그 간격에는 다행히도 혹은 불행히도, 그 기한의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그 결과는 너무나도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이다.
언제나 끝은 도래하고 마지막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삶에 끝이 없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우리 삶은 유한하기에, 아마도 우리 삶의 요소들에선 그 끝이 없음을 찾아볼 순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 끝을 항상 의식하며 신경 쓰며 살고 싶진 않기에, 사실은 그렇게 살아갈 수도 없기에, 때로는 잊기도 하고 때로는 화들짝 놀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간발의 차이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하지만 그 간발의 차이로 들어서고 혹은 들어서지 못하는 그 끝이 우리 삶 자체의 끝이 아닌 이상에야, 우리 삶에는 또 다음의 기회와 다음의 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은 또 그런 흐름으로 주어지고 이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그 간발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그 강렬하고도 극적인 감정은 그 한정된 끝에 관한 것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삶에 그다음의 끝은 또 찾아온다. 놓친 버스 다음에 다음 시간대의 버스가 오고, 놓친 신청일 다음에는 다음 달 신청 기간이 있는 것처럼. 오직 그 기회일 순 없어도 다른 유사한 기회들은 또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언뜻 안일해 보이는 마음이 연속적 실패를 조장하고 또 변명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밖엔 없다는 절박함과 그 아슬아슬한 짜릿함에만 내몰리거나 또 취하게 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간발의 차이란 그 순간에 대한 간격일 뿐, 그다음 순간과 함께 놓고 보면 그리 또 다급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