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기에 시기는 없다
내 인생이 잘되길 간절히 바란다
요즘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하얗고, 노랗고, 작고, 큰 사랑스러운 강아지들... 사택에 동료들과 살면서 무슨 수로 강아지를 키우냐고? 할 수 있다. 유튜브에서! 그렇다. 가상의 공간에서 여러 마리의 귀여운 강아지들을 보며 손주를 보는 할머니의 마음처럼 함박미소를 지으며 나의 원픽 강아지들을 돌본다. 세상 참 좋아졌다. 원하면 언제든지 타인을, 그리고 그 소유물을 관찰할 수 있다. 때론 이게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다행히 '나만 없어 고양이(영화 제목이기도 한데 못 봤다)'라는 짤처럼 부러움과 궁핍함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귀여운 강아지들을 보며 행복을 느낀다. 이렇게 좋은 것만 취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람 마음이 다 같을 수는 없나 보다. 누군가는 타인의 소유물에 압도당해 좌절을 맛보며 괴로워하고 그러면서도 마약같이 그 시기심과 상대적 박탈감에 중독되고 만다. 처절하게 불행을 느끼며.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하건대, 정말로 진실로 나는 질투심이 많지 않은 아이였다. 너무 강조해서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상황이지만, 그래서 다시 풀어서 얘기하자면 질투나 시기심 대신에 부러움이 더 큰 사람이었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잘 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잘 안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면 시기심이고 남이 잘 된 것을 보고 나도 잘됐으면 하는 마음은 부러움이라고 생각한다. 질투와 시기에는 남을 해하려는 악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내 인생이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랐을 뿐, 누군가를 끌어내려 내가 돋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이 마음이 나 또한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았으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 텐데 어쩐지 계속 실패만 하는 내 모습에서 시기심과 부러움 그 중간의 무엇이 발견되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남이 잘되면 그 사람이 고꾸라지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뭔가 그 소식이 아주 반갑지는 않았다. 나는 그대로니까. 그대로 인 것 같으니까. 그런 시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4~5년쯤? 어찌 보면 참 긴 세월 같다.
무기계약직으로 취업을 하고도 한동안은 그 마음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자각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누군가에게서 좋은 소식이 들려와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나이를 먹어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이 직장에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어서였을까. 이런저런 영향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가장 큰 이유를 꼽는다면 아마도 이제는 남이 아닌 내 인생에 더 집중을 해서이지 않나 싶다.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속도로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 가는 내 삶.
때론 목표 달성이 실패할 수도, 늦어질 수도 있지만 남을 보느라 내 삶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낭비인지 깨달았다. 그는 그의 인생을 살고 나는 나의 인생을 살면 된다. 내 삶에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일 뿐 남이 어떻게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내 인생의 작가이자 감독이고 주연이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내가 바로 서야 한다. 나 자신에 더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의 황금기도 곁에 와 줄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 이솜 언니가 질투쟁이에게 멋지게 날려준 대사 나가신다.
"나 좀 그만보고 너를 봐, 니 인생이나 신경 써"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