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으로 나를 보기
수능을 치고도 몇 해까지는 수능 날이 다가오면 여전히 긴장되는 하루였다. 재수를 할 생각은 없었음에도 이상하게 고등학생 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직장인이 된 지금은 그저 한 시간 늦게 출근하는 기쁜 날일 뿐 아무런 감흥이 없다. 대학 수학능력시험, 그 이름조차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낯설기만 한데 그래도 올해는 유난히 따뜻하게 지나간 듯하다. 사실 나의 수능 시험날에도 별로 떨지 않았다. 어차피 점수는 높든 낮든 나오는 것이고 거기에 맞춰 대학을 지원하면 되는 거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그리고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
인생에도 인생 학력 시험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시험은 잘 칠 수 있을까? 과연 그 시험 범위는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니까 내가 가진 자산으로 평가를 하게 될까? 그렇다면 그건 공부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끔 나 잘 살고 있나 궁금해하며 시험처럼 점수로 나오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마도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 착착 잘 진행되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진 않았겠지 하다가도,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살아 보이는 사람들이 가끔 엉뚱한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본래 끊임없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구하며 괴로워하는 미천한 존재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대학과 달리 취업은 조금 다른 문제로 다가왔다. 많은 회사에 지원했고 많은 시험과 면접을 치렀는데, 대학만큼 거기 안 되면 다른 곳에 간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사실 대학도 그중에 성에 차는 곳의 범위와 한계가 있었고 다행히 그 범위에 들었다면, 취업에서는 그 범위에 안착하는 것이 참 힘겨웠다. 특히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보니 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맞지도 않는 곳에 가서 하염없이 내 차례가 올 거라며 줄을 섰던 과거가 후회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참 간단한 문제인데 왜 그렇게 굴복하고 인정하기 싫었던 걸까. 물론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사실 이 모든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들에게 보이는 나 사이의 괴리에서 유인한다. 그 간극을 좁혀나가는 것이 인생의 숙제일 것이며, 어떻게 좁힐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나의 능력을 키워서 눈높이를 맞추는 방법과 나의 눈을 낮춰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이 있다. 물론 이 괴리감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그저 불평불만으로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그 방법은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은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나도 한때 그렇게 살았음을 고백해야 할 때인가.
요즘 취업이 힘들다 보니까 회사에서는 가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는데,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졸업해도 누구는 정규직으로 일하고 누구는 계약직으로 일하는 상황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심지어 고졸 채용 정규사원보다 더 열악한 처우를 받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그 상황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같다. 나라고 달랐겠는가. 내 대학 동기들은 대기업이며, 공기업이며 어디든 잘 가서 정규직으로 대우받으며 일하는데 과탑도 심심찮게 했던 내가 왜 계약직만 전전하고 있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남들은 나를 내 대학 동기들보다 내가 지원했던 그 일을 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오직 나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봤다.
시간이 흘러 내가 단순히 동기들보다 그 일을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차원을 넘어서, 그 일을 하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나의 무지를 스스로 증명한 셈이 되었다. 좁고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나는 피해자가 되고 만다. 스스로 피해자가 된 사람들은 결코 아무도 나를 구제해 줄 수 없다. 세상이 바라볼 땐, 내가 피해자가 아니기에 나를 구해 줄 생각도 하지 못하는데 나만 억울하게 피해자가 되어서 괴로움만 토로하고 사는 꼴이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이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인생을 좀먹으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 학력시험이 생긴다면 나 자신을 객관화하는 과목은 필수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