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날

가라앉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

by 우비소년

우울하다.

너무 우울해서 한참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있는 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친척들이 모이면 하는 이야기 중에서 나와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댁 마당에서 놀다가 화단을 위해 만들어 놓은 큰 풀라스틱 물탱크에 빠져 죽을 뻔 한 적이 있다고 자주 말씀들을 하신다.

외삼촌이 근처를 지나가시다가 소리를 듣고 달려와 나를 물속에서 꺼내 주셨다는데, 사실 너무 아기때의 일이라 기억에는 없지만 이 경험이 잠재의식 속에 기억이 되어 있는지 가끔은 물 속에서 하늘을 보는 꿈을 꾸고는 한다.

(외삼촌 말씀으로는 어디서 고양이 물먹는 소리가 나서 궁금해서 가 보셨다고 한다.)

사실 아주 어린시절 아기 때라 그 느낌까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는 숨도 못쉬고 물속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을지 모르는데 시선은 어찌해서인지 하늘을 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 묻는다면 늘상 꿈에서 그렇게 하늘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답답하고 숨이 조여오는 상황에서도 그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물속에서의 파란 하늘은 에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어서인지 외롭거나 슬플때면 항상 그 이미지가 꿈으로 나타나거나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우울해서 가라앉는다는 의미는 저 눈 앞에 보이는 예쁘고도 아름다운 하늘과 점점 멀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울하면 우리는 흔히 가라앉는다는 표현을 많이 시용한다. 누가 이런 표현을 처음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너무나 적절하고도 가슴깊이 감정을 공감하는 표현이 아닌가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바라고있다. 떠오르고 싶다고..


난 지금 가라앉고 있다.

한참을 내려가고 있어서 이제는 하늘은 저 멀리 작은 빛으로만 보인다.

어둠이 찾아오고 익숙해지니 이제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는 여유가 생긴다.

혹시라도 나 말고 지금 나와 함께 가라앉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엘리스는 나무밑둥에서 떨어져 동굴로 내려가면서 많은 물건들을 보았는데 (이건 가라앉는다는 표현보다도 떨어진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내 주위에도 부산하게 많은 물건들이 함께 가라앉고 있다.

엘리스와 나의 차이점이란 엘리스는 그 상황을 즐겼다는 것이고(반쯤 포기는 아니었을까 생각하지만) 나는 헤어나오려고 한없이 발버둥을 친다는 것이다. 수면도 없고 바닥도 없는 그곳을 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정신을 차려야한다는 생각은 계속 가지고 있다. 그저 의미없는 발버둥만 치면서 떠내려가거나 가라앉는다면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살려고 노력중이다.

이렇게 고요하고 어쩌면 아름답기까지한 이곳에서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란 참 유머러스하다.


문득 어떤 경험이 스쳐 지나간다.

아주 잔잔한 바다였다. 그래서 수영을 잘 못하지만 구명조끼를 믿고 물에 떠 다녔다. 내 키보다 절반쯤 더 깊은 곳에서 그렇게 놀다가 갑자기 닥쳐온 파도에 휩쓸린적이 있다.

구명조끼는 사람이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파도도 이 사람이 수영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

뒤집어져 물살에 휩쓸린 나는 먹은 물 때문에 짠맛을 느끼며 숨이 막혀져 왔다.

살려달라면서 소리치고 발버둥치면 죽음이라는 것과 아주 가까이 만났을지도 모른다. (진짜 만났을지도..)

순간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꼭 닫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사실 바닷속을 거꾸로 보는 경험,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깨끗한 바다라 아무것도 없이 모래바닥만 있었지만, 딱 하나 검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거기 작은 바위 하나가 모래에 몸을 묻고 있었고, 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삐죽히 모래위에 머리가 나와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필사적으로 헤엄을 쳤다.

그때 손으로 잡았던 바위의 느낌이 손 끝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사실 첫번째에 성공한 것도 아니라서 더 생생하다. 두세번 끝에 겨우 바위를 잡고 약 3초정도를 가만히 있었다.

고맙기도 했지만 마음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 위급한 순간에 (숨도 참기에는 한계 지점까지 온 상황이었다.) 잠깐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순간 찾아온 삶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신을 먼저 가다듬은 다음에 일단 몸을 똑바로 세우고 다리를 박차면서 수면으로 올라갔다. 수면에서 숨을 들이쉬는 순간 너무 행복했다. 숨쉰다는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수면에 설치된 수영독에 겨우 다달아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그 하늘을 보고서야 나는 살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사실 그 바위에게 감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곳이 어딘지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인생에서 가라앉다가 떠오르다가 심지어는 날아가는 일들은 항상 찾아온다. 다만 가라앉는다던지 떠오른다던지 날아오르는 일들의 기준은 항상 '나' 이여야만 한다. 남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너무 그 기준을 낮게 잡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너무 낮으면 정말 너무 쉽게 빠져 죽을 수 있다. 그리고 너무 자주 허우적거리게 된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경험이 사실 삶에 있어서 뭐 대단한 변화를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힘든 때에는 그 작은 검은 바위를 떠올리거나 꿈속에서만 보던 파란 하늘을 기억하고 떠올린다.

누구나 삶에 있어서 가라앉는 시기나 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스로 올라 올 수 없을 때 버텨줄 버팀목이나 손잡아 줄 손이 곁에 있느냐는 것이다. 인생에서 그런 것 하나쯤은 만들어 구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뭐 없다면 기적처럼 접을 수 있는 동앗줄이나 바위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 다시 하늘을 만나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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