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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정메이트 Nov 06. 2020

엄마, 나 신고할 거야

나는 아이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이가  어느 날, 부모도 어려운 문제나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관해  물어보면 참 난감하다. 아이에게는 절대 해서 안 되는 행동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행동하는 사람인가? 과거의 경험을 들춰보고 현재를 들여다보며 반성을 하게 된다.


한참 놀이하고 있던 아이가 갑자기 나에게 묻는다.

“엄마, 학교폭력이 뭔지 알아?”

“어? 그건 왜?”

“오늘 학교에서 학교폭력 교육받았거든. 은따가 뭐야?”

“아.. 한 아이를 두고 반 아이들이 안 놀아 주고, 놀리고, 때리는 것을 왕따라고 하고, 은따는 같이 말은 하는데 그 아이가 오면 슬슬 피하거나 같이 놀다가 따돌리는 것을 은근히 따돌린다 해서 은따라고 하는 거야”


“응.. 그렇구나, 엄마 나 건우 117신고할 거야”


건우는 채린이와 같은 반 친구다. 아이를 데리러 갈 때마다 자주 만났던 아이다. 건우는 채린이가 좋은지 계속  놀리고,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채린이도 웃으며 하지 말라고 말하다가 요즘은 건우가 보이면 숨거나, 건우 없을 때 차에 탄다고 말한다.  나는 웃으며

“건우는 왜? 그 정도 일로 신고하는 거 아니야”

“왜 안 되는데? 건우에게 나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 놀리지 말라고 해도 계속하잖아, 선생님께 말해도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해서 건우 혼내지도 않고.. 그럼 나 어떻게? 난 정말  힘든데.. 그게 학교폭력이잖아”

라고 아이가 갑자기 펑펑 우는 것이었다. 아이가 건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솔직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건우는 그냥 나에게 채린이의 귀여운 친구 정도라고 생각했다.     

우는 채린이를 보고 당황도 되었고, 예전의 나의 일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조금은 모자란 아이였다. 선생님께 혼도 많이 나고, 잘 안 씻는지 냄새도 났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남자애를 피하곤 했다. 흔히 말하는 왕따였다.

어느 날,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그 아이와 잠깐의 대화를 했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내가 고마웠는지 그 후에도 나에게 가끔 말을 걸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그  아이가 나한테 오더니 확 껴안는 거였다.

“나, 너 좋아”

라고 말하면서 실실 웃는데, 정말 그 순간이 나한테는 공포였다.

그리고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이들은 일제히 나와 그 아이 곁을 피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를 창피함으로 난 그 아이를 힘껏 밀어내고 교실 밖을 나갔다.

그 후에도 그 아이는 그런 장난을 계속해서, 채린이가 건우를 피하듯이 나 역시 한동안은 그 아이를 피했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으면서 아이 마음을 몰라주었다. 얼마나 힘들지 생각 못 했다. 상대방이 싫으면 행동의 강도를 떠나 그건 관심이 아니라 ‘폭력’이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또래 집단 따돌림에 대한 논문을 본 적이 있다. 요즘 아이들 따돌림은 우리 때랑 비교해서 상상을 초월한다. 학생 중에 핸드폰 사용자가 많아서 요즘은 SNS 따돌림도 있다. 이른바 ‘사이버불링(cyber bullying)’이라고 일컫는다.

원하지 않는 카톡에 초대해서 보여주기 싫은 사진을 단체 카톡에 올리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화가 나서 대화방에 나가면 끈질기게 계속 초대를 한다. 그것을 이른바 ‘단톡 감옥’이라고 불린단다. 유튜브 영상을 봤었다. 내가 피해자가 되어서 간접 체험해보는 영상이었다. 나는 잠깐의 영상을 보는 것만 해도 피로가 왔으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잠을 자는 시간까지 대화 초대는 계속되었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집단 괴롭힘은 사회에 나와서도 어느 조직에서나 볼 수 있다. 어릴 때처럼 집단 왕따는 잘 없지만 은따는 솔직히 흔하다. 은따에 참여는 안 해도 내 알 바 아니라는 방관자들도 있다. 괜히 나섰다가 추종자들에게 찍혀서 꽤 일이 피곤해지거나  인사고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에 지켜보기만 하다.

서미정 교수의 <<방관자의 집단 특성에 따른 또래 괴롭힘 참여 역할 행동>>논문에 의하면 방관자는 암묵적 승인에 의해 가해 행동을 강화하여 또래 괴롭힘을 지속시키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나 역시 누군가에는 방관자였는지 모른다. 집단에서 한 사람을 욕하면 그냥 묵묵히 들어주거나 애써 무시했었다. 어쩌면 동조하는 합의적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앞으로 아이는 커 가면서 앞에서 얘기한 경험을 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해자(끔찍하지만),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아니면 또래 괴롭힘을 보고도 모른 체하는 방관자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까?

더는 피해자가 고통 속에 살지 않고 또한 방관자가 죄책감을 느끼는 사회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부당한 대우나 처우를 당할 때 다수가 옆에서 힘이 돼주고, 지켜줄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가해 행동이 강화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오늘 아이 이야기를 듣고, 학교에 가서 건우를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건우야, 채린이가 요즘 건우가 계속 따라오고, 놀려서 힘들대. 건우는 채린이랑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는데, 조금만 채린이 생각도 해줄래? 채린이가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해주면 좋을 것 같아. 그러면 채린이도 건우랑  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도 있어. 아줌마가 부탁할게”

아이가 힘들 때 툭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그리고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엄마에게 말하니 큰 힘이 되었어'라고 아이가 생각했으면 좋겠다.

가정마다 그런 소통들이 모여 더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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