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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의 반란 Sep 26. 2021

캐나다 대학원에서의 조교생활

아직도 남아있는 영어 울렁증 도전기

캐나다에 온 지 어느덧 7개월


이곳은 이번 가을 학기부터 일부 수업이 대면으로 전환되었다.


직접적인 그리고 간접적인 압력(?)으로 인해서 이번 학기 부터는 대학 학부생 과목의 조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회사를 나와서 대학 강의 경력도 어느덧 만 2년을 채웠지만, 이곳에서 영어로 해야 하는 조교생활의 부담감은 적지 않게 다가왔다. 이 곳의 조교는 한국의 조교와 다르게, 강의 후 학생들에게 튜터링을 해야 하는 강의 성격의 시간들이 포함되어 있고, 학생들이 제출한 모든 답안의 채점을 조교가 해야한다.


이런 무거운 마음으로 처음 조교를 지원을 할 때 큰 관심이 없어서 덜컥 계약서에 싸인을 했는데

그 때 대충 본 게 학기중 4시간의 강의였다. 어라? 영어로 4시간을 어떻게 수업을 진행을 할 수 있을까?

대학에 와서야 비로소 영어를 배울 수 있었던 시대적 한계가 더 커보였고..


그런 고민이 깊어졌을 때 더욱 큰 충격이 다가왔다.

계약서를 꼼꼼히 보니 학기 전체중 4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4시간씩 12주를 티칭을 해야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본 밴쿠버)


영어로 주당 4시간씩 강의라니..

기자생활을 하면서 목숨이 오가는 위험한 순간도 잘넘겼지만


역시 고통은 거대한 순간이 아니라 이렇게 작은 일상에서 나온다...



어떻게 하지?


.....


그런 근심을 안고 그렇게 첫 주가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니 마음이 의외로 편안하다.


'내 마음의 한계를 넘어가버리니 오히려 마음의 힘이 이렇게 빠질 수 있구나'


오히려 정말로 학기전체 중 4시간만을 하려고 했다면 잘하려는 심적 압박이 상당했을 것 같다.


하지만, 양 자체가 너무 황당하니 이상하게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 해졌다. 그리고 이 시간을 즐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지금 나에게 주당 4시간이란 것은 즐기지 않으면 피해갈 수 없는 시간들이다.

집에서 보는 노을


그리고, 다시 출발점을 생각해 본다.

지금 하는 도전은 일상을 떠나서 할 수 있는 보너스 같은 시간들이다. 정년보장과 많은 돈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은 시간이었다. 지금 시간을 즐기지 않으면 도대체 이 모든 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지금의 시간은 회사 안에서의 시간과는 다르다.

가족과의 시간. 조직을 떠나서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나만의 시간, 그리고 직업적으로 가장 농밀해 질 수 있는 정말 내가 원하는 일에 대한 시간.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지, 또 미래에 누군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이 있을 지 모르겠다. 그분들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명징하게 보이는 퇴사의 가장 큰 장점은 시간의 결이다. 내가 삶과 모든 시간을 기획을 하고, 내가 오롯이 결과를 즐긴다.  


조직의 시간도 물론 나에게는 소중하고 훌륭했다. 하지만 조직문화 안에서 단기간에 돌파할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라는 게 분명 있었다. 그건 사회 문화와 함께 가는 것이라서 그렇게 빨리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닌듯 하다. 그런 시간을 붙들고 있기에는 내게 에너지가 아직 많았고 그만큼 또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아쉬웠다.


그 시간을 보다 소중하게 사용하고 싶다.

코로나로 인해 어느덧 딸과 보낸 시간이 2년이 되어 가고 있고, 이런 생활 덕분에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이 예정되어 있다. 돈을 벌어오는 역할을 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상이 아닌, 이렇게 함께 인간적으로 힘들어하고, 그 순간을 이겨내는 것을 보여주고, 함께 해주는 시간들이 많아진다면, 또 그렇게 내가 딸의 기억속에 남는다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이제 막 중딩이 된 딸은 꼰대를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린다.


미디어 업종에서 20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세상을 다 아는 것 같이 말을 했었지만, 이렇게 새로움에 부딪치는 순간을 가진다면 그렇게 모두 아는 것처럼 말 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꼰대는 생물학적인 나이가 아니라 내가 새로움과 모르는 것에서 눈과 귀를 가리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수업에서 학비를 걱정하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고민을 나누고, 그들의 애환을 듣고, 학문적으로 흥분하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경험한다.


더군다나 조교는 무급이 아니라 매달 장학금과 돈을 받는다. 이렇게 돈을 받으면서 꼰대가 되는 시간을 늦출 수 있다면, 또한 이런 작은 일에서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버거운 시간들이 한편으로는 만족스럽다.


마음이 여기에 다다르니 이건 시련이 아니라 나의 성장을 위해서 신이 주신 거대한 블럭버스터형 영어학원 같은 생각이 든다. 영국을 유학갈 때 아이엘츠 점수를 따려고 많은 고생을 했고, 이곳에서 박사를 하면서 영어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만, 이번 학기가 지나가면 많이 성장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훈수를 즐기는  배불뚝이 꼰대 아저씨가 될 나이에도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다. 삶 자체가 무한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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