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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대의 반란 Apr 10. 2022

이런 교육이 감당이 될까?

캐나다에서 한국교육을 생각하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외국과 관련이 없는 일을 평생 해왔는데도, 영어와 그렇게 관련이 없는데도,

어떻게 살다가보니 영국과 캐나다의 교육을 모두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곳의 대학생 아이들의 성적을 내고 평가하다보니,  같은 세대의 한국 대학생들과 비교하는 기회도 생기는 것 같다.


라떼는 말야로 시작되는 학력고사 세대인 나는 수험생 100만명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더더욱 기회가 되면 내가 겪었던 입시지옥을 딸이 다시 뚫고 지나오게 하지 않으리란 다짐을 하곤 했다. 그 당시 무법지대 같았던 학교는 성적이 떨어진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교사들도 더러 있었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채찍질이 아니라 교사 자신의 평판과 성과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는 더욱 분노하곤 했었다. 이런 과정들을 넘어서 대학에서 좋은 선후배들을 만나고, 안정적인 직장에서 좋은 동료들을 만난 것은 분명 큰 보상이었던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그 것들을 얻기 위해 그 과정을 지금까지도 누군가가 다시 거쳐야 하는 것도, 그것이 반복되어야만 한다는 것도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캐나다 대학 강의실



서양의 교육이 그러하듯 이곳의 교육은 우리에게 낭만화되어 있다. 스트레스가 없고, 대학을 들어가는 것은 쉽지만 졸업이 어렵다라는 이야기들은 이 곳에서도 자주 듣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막상 이곳 대학에서 학생들의 답안을 채점을 하다가보면, 한국의 뛰어난 학생들이 왕왕 생각 난다. 우리가 입시지옥으로 몰아넣으며 보낸 시간들은 일정 부분의 아웃풋은 분명 나오는 것 같다. 캐나다에서도 영국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한국 학생들의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문제는, 유년을 모두 박탈하는 교육전장으로 몰고가서는 어느 누구도 그 끝에서는 개인의 인생에 책임을 져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학만 졸업하면 취업이 되던 세대, 학점 관리만 하던 세대와는 달리, 우리는 이 초박빙의 무한 경쟁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보상이 보장되어 있는지를 그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불안감이란 장작을 집어 넣고 사교육 시장은 다시 뜨거워진다.


캐나다 이이스링크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막상 딸을 중학교에 보내보니 캐나다 교육이 불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딸은 캐나다인이 아니라 '무한 경쟁의 나라'의 구성원이다. 또래들이 한국에서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자신을 갈아넣을 때 딸은 이곳에서 원반 던지기와 수영 다이빙을 배운다. 엄격한 관리를 지향하는 우리 나라의 교육과는 달리, 딸이 다니는 학교는 교과서도 없고, 선생님들의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이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그래서 이 길이 맞는 길인가를 생각하고 불안해 할 때도 있다. 캐나다 교육을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교육이라고  낭만적으로 보는 시선들이 많지만 학교의 울타리안에 있다가 보니 나는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캐나다 BC주 태권도 대회


교육 시장이 작아서 많은 돈이 드는 교재 개발이 경제적으로도 쉽지 않다라는 은퇴한 캐나다 선생님의 이야기도 그렇고, 줌수업을 할 때 학생들에게 화면을 켜달라는 요청을 하지말라고 하는 학교의 방침은 참여 수업을 상당히 힘들게 하는 부분도 있다. 학생인권에 대한 존중이 우선되지만, 그것을 남용하는 학생들도 많고, 그 모호함 속에서 학교가 책임을 회피하는 부분도 보인다.


그래서 묻는다.


"미국 교육과 비교해서 캐나다의 공교육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캐나다 공교육이 너무 학력향상에 무관심한 것은 아닐까요?"


이런 질문들을 기회가 있을 때 자주 던지곤 한다. 그중 제일 맘에 와닿는 대답은 이렇다.


"이런 교육을 통해서도 그만큼의 훌륭한 사람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니 그렇다. 캐나다 학생들이 미국과 영국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 국가들의 학생들에 비해 학업시간이 확실히 떨어지는데, 대학에서 비슷한 수준의 인재들이 양산된다면 이 나라 교육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이 곳 아이들은 자신의 유년기를 학원에 갈아넣지 않고, 개인적으로 보내는 자유시간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결국 자신의 과정과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다. 대학의 낮은 문턱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학생 각자의 선택과 책임은 학생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시스템이 문제가 있어 보였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들을 좁은 교실에 몰아넣는데, 최소한 그 희생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 비하면 굉장히 직관적이고 효율적인 것 같다. 무한경쟁으로 아이들을 몰고가지만, 그 보상을 보장할 수 없는 사회가 가장 고비용 구조인 것 같다. 아무리 아웃풋이 잘 나와도 이런 경영법은 그래서 지속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결국, 교육제도는 역사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한 것 같다.

거대하고 거친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곳에서는 체육활동을 학교에서 강조한다. 자연 부국인 이곳에선 우리 같은 교육이 필요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충분조건은 아닌 듯하다. 그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직업의 서열이나 사회안에 만연한 위계적 틀이 없어야 하고, 또한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살 수 있는 임금체계가 가능해야 한다.


캐나다 BC주의 최저생계비는 우리 보다 50% 이상 높다. 한국에서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대학강사를 하기도 요즘 어려워졌지만, 그렇게 해서 받는 월급은 이 곳에서 일주일에 2회 조교를 해서 받는 돈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결국, 교육수준으로 차별받지 않고 고등교육을 받지 않아도 생계가 가능한 중산층이 두터워져야 교육의 문제도 답이 나올 것 같다. 그건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 생활 전반의 일상적 공간에서의 생활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캐나다 교육은 또한 유독 팀과제가 많다. 함께 협업하며 얻게 되는 사회성을 중시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입시지옥과 경쟁이란 틀을 거둬야만 실효성이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팀과제를 줄 때는 부담이 갔다. 학력평가 자체가 상대평가이다보니, 외국 학생들과 조가 되거나, 학력이 뒤떨어진 학생들과 조가 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


전인교육으로 나아가자고 한 모토들은 내가 중고등학교 때부터도 들었던 것 같다. 이걸 학생들이 쟁취해 낼 수는 없다. 학교가 더이상 전장이 아니었으면 싶다.


캐나다 중학교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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