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
꿈이었다.
복권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축하드립니다. 당첨금 4만 8천 원을 수령해 가세요.”
어리둥절한 채 전화를 끊고 나서야 내가 언제 복권을 샀는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길을 걷던 어느 날이었다. 주말마다 로또를 사는 친구를 따라 무심결에 5천 원어치를 샀고, 대충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그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로또를 찾자마자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00씨, 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4만 포인트를 보내드립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횡재람? 금액을 합쳐도 고작 8만 원인데, 이런 돈이 공짜로 들어오다니.’
마음이 두근거렸다. 작은 돈이지만 마치 세상이 나를 특별히 선택해 준 듯한 기분이었다.
꿈은 거기까지였다.
눈을 뜨니 새벽 6시. 2025년 1월 1일의 첫날이었다.
언니와 산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은 6시 30분. 이미 늦은 것이었다.
“나 이제야 일어났어. 7시에 보는 게 어떨까?”
톡을 보낸 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었다. 차 키를 집어 들고 주차장으로 내달렸다.
일출 시간은 7시 40분쯤이었다. 경험상 해 뜨기 30분 전부터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할 것이었다. 언니와 나는 만나자마자 헤드랜턴 없이 산길을 올랐다.
어둠은 점차 얇은 막처럼 사라지고 여명이 산 아래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푸른 남색 톤으로 변해 갔다. 그 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 걸친, 세상의 처음과 끝이 교차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혼잣말을 던졌다.
‘빛이 잠시 숨을 고르고, 어둠도 아직 물러나지 않은 시간… 오후의 개와 늑대의 시간처럼.’
한참을 걸어가며 지평선 너머로 느껴지는 해의 열기를 마주했다. 나는 문득 언니에게 꿈 이야기를 꺼냈다.
“뭔가 올해는 좋은 일이 올 것 같아. 큰 행운은 아닐지라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며 살라는 뜻 같아. 아마 주변 사람들 덕도 많이 보게 될 것 같고. 지지부진했던 삶에 기분 좋은 변화가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하지만 다리가 점차 무거워져 왔다. 운동을 쉰 지 오래였으니 당연했다.
중간의 바위투성이 구간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 해를 보면 되지 않을까? 이쯤에서 쉬고 하산하자.”
언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 뜨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 더 올라가자.”
작년에도 한참을 기다렸다 해를 본 기억이 떠올라 나는 언니의 말에 설득당했다.
길은 점점 더 가파르게 바뀌었다.
손으로 바위를 짚으며 한 발씩 옮겨갔다.
쉼터에 도착했을 때 나는 도시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따뜻한 차를 꺼내 마셨다.
“여기서 기다리면 될까?”
나는 언니에게 물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 두 분이 말을 걸어왔다.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에요. 우리도 지금 올라갈 거예요.”
“네? 꼭 올라가야 해요?”
나의 표정은 혼란스러웠다.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어서요. 조금만 더 가면 훨씬 잘 보여요.”
언니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가자.”
길을 따라 더 올라가자, 정상에 가까워졌다.
그 순간 산 능선 뒤에서 해가 환한 빛을 쏟아냈다.
다 올라가기엔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우리는 멈춰 서서 자리를 잡았다.
벤치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았다.
여명의 순간은 점차 사라지고, 태양이 찬란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몽환적이고 낯설었다.
뒤에서 아주머니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얼굴을 드러내면 순식간이에요.”
정말 그랬다.
해는 뜨기 전에는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자신의 순간이 오면 단호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감탄을 쏟아냈다.
사진을 찍던 언니가 다가와 내 어깨를 살짝 눌렀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나는 웃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의 목소리는 산속 곳곳에서 등산객의 메아리로 돌아왔다.
뭉클하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제 그만 정리하고 하산하려는 순간 뒤에서 아주머니가 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조금만 더 보고 가요. 첫 해는 이 순간이니까요. 소원 따윈 없어요. 가족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기만 하면 그게 최고죠. 돈보다 건강이 훨씬 중요해요.”
그 말에 나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나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아주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맞아,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지 못할 때가 많지.’
산 능선 위로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 태양은 세상을 정복한 왕처럼 당당했다.
빛이 사방으로 퍼지며 어둠의 잔재를 몰아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찬란한 축제였다.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이 빛처럼 내 삶에도 따스한 변화가 찾아오길. 내 소망이,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언니와 나는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올해는 국가애도기간이라 떡국이나 다른 새해 행사도 모두 취소되었지만, 산의 조용한 분위기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침묵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잔잔한 공감과 위로가 느껴졌다.
하산하는 동안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생각해 보면, 아주머니들과 네 말이 없었다면 좋은 장면을 놓쳤을지도 몰라. 내 고집대로 여기서 멈췄다면 그냥 평범한 새해로 끝났겠지.”
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인생 아니겠어? 누가 뭐라 해도, 주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게 결국 큰 기쁨을 주더라고.”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올해는 아마 그런 해가 될 것이다. 꿈의 내용처럼 뭔가 뜻밖의 선물이라는 것이 어쩌면 나의 행동에서 오는 것일까?
친구 따라 로또를 샀다는 것은 어쩌면 상징적으로 보면
내 생각만이 옳다고 믿지 않고, 주변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리라는 뜻일까?
경청은 타협이자 상생이고,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첫걸음일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결심했다.
‘더 많은 지혜로운 목소리가 내 귀에 머물게 하자. 그 안에서 내 길을 찾아가자.’
멀어지는 산등선을 뒤로하고 나는 속삭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모두 다.”
산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새해의 첫날이 주는 따스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