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여름
무더운 계절이 다시 찾아왔다.
여름은 언제나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장맛비가 내리고, 시냇물이 흐르고, 수박과 참외 같은 여름 과일의 싱그러움이 떠오른다.
폭염이 시작되면 몸도 마음도 쉽게 지친다.
에어컨이 있는 공간은 그 어떤 장소보다 반가워지고,
더운 바람이 부는 자연 속에서는
그 바람조차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천천히 그 바람에 적응하면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여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름 본래의 감각을 잊고, 불편하다고만 여긴다.
여름은 다채롭고, 드라마틱하고, 때론 극단적이다.
그래서 여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렇기에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이 필요하다.
여름이 특별한 이유는,
무덥고 땀이 흘렀던 기억조차
시간이 지나면 감촉과 불쾌함이 희석되어
기억 속엔 좋은 잔상만이 남기 때문이다.
한여름, 교복을 입고 집으로 가던 길은 늘 멀었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한 손엔 부채, 다른 손엔 막대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었다.
목은 바짝 마르고, 축축 처진 걸음걸이는
여름이 주는 무기력함 같았다.
하지만 버스에 올라 에어컨 바람을 맞는 순간,
그 시원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격이었다.
집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고,
등에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시원함,
대나무 돗자리에 대자로 누워 선풍기를 틀면,
그 순간은 여름만이 줄 수 있는 쾌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여름 속에서 작은 기쁨을 누렸었다.
그 감성을, 우리는 언제부터 잊게 된 걸까.
조금만 땀을 흘려도 불쾌해하고,
여름을 싫어하며, 기후변화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매년 여름은 새삼스럽게 찾아오고,
사람들은 늘 이번 해가 더 더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란다.
어릴 적,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주일학교의 젊고 아름다운 선생님.
목까지 내려오는 곱슬머리,
단정한 흰 블라우스, 짙은 남색 스커트.
그 모습은 그 자체로 여름의 청춘이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뒷산 소풍을 가자 하셨다.
햇살은 눈부시고 뜨거웠고,
동네 슈퍼를 지날 때 선생님은 복숭아 한 봉지를 사셨다.
선생님을 따라 우리는 동네 슈퍼를 지나 마을 어귀를 천천히 벗어났다.
햇살은 여전히 따갑고, 발밑의 흙길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간 걷다 보니
풀내음이 짙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숲의 입구에 다다랐다.
그늘이 드리운 나무 아래, 작은 벤치에 둘러앉자
선생님은 봉지에서 복숭아를 꺼내 들고
정성스럽게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과즙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고,
달콤한 향기에 나는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껍질을 벗긴 복숭아를
우리 손에 묻지 않도록 조심스레 입에 갖다 대주셨다.
그 순간, 나는 선생님의 복숭아빛 젊은 피부와 그 여름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여름은 무덥고 축축하지만,
기분 나쁜 기억만 가득한 계절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모든 불쾌감은 사라지고,
좋은 것들만 알알이 추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나에게 여름은
사계절 중 가장 기다려지는 계절이 되었다.
그 안엔, 소중한 감정들과 잊히지 않는 풍경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