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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기를 가르치기 위해 아들과 산 정상에 오르다.

아들 키울 때 이런 점이 좋았다 part 1

by 바크


나는 딱 4번의 산 정상을 밟은 적이 있다. 등산이 취미여서도 아니었고, 운동을 좋아해서도 아니었으며, 개인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우리 부부의 다른 육아관

남편은 주방 문턱을 넘어서지 않도록 키워진 전통적 사고방식의 집안 출신이다. 반면 나는 학생인권부터 시작해 부모 세대가 누려보지 못한 교육을 받은 세대였다.

그래서 남편은 결혼하면 월급만 가져다주면 가장 역할을 다한 것으로 여겼고, 아내는 육아와 맞벌이, 재테크, 가사노동까지 모든 것을 담당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물론 내 남편의 경우이지, 모든 한국 남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남편은 회사 생활의 고충과 스트레스가 여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다며, 스스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낚시, 골프, 캠핑 등 온갖 취미에 빠져 있는 취미 부자다.


그런 그에게 딱 하나 부족한 것은 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아마 고민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집보다 밖에 나가야 놀 거리가 있었다. 남편은 골목대장을 자처하며 오락실에 가거나 공놀이를 하거나 친구들과 강에서 수영을 하는 등 외부의 재미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나 또한 남편보다는 어렸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여성으로서 정적인 취미를 가졌을 뿐이다.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교통수단이 버스뿐이라 걸어서 대중교통을 타고 친구 집으로 이동하는 것이 유일한 야외 활동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나? 나부터 아이들 학원 라이딩을 해주고, 가까운 학교마저도 차로 등교시켜 주었다.



끈기는 어떻게 가르칠까?


인간 세상에서 대화만큼 쉽게 사람을 설득하는 도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려면 지구력이 필요하고, 아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길고 긴 시간과의 싸움에서 결국 끈기 있게 설득하는 사람이 승자다.


우리 집 같은 경우, 남편은 아이들을 도제식으로, 상하 관계의 명령으로 단 한 번에 말을 듣게 하려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가 윗사람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기는 하는가? 내면에 불만이 있을 수도 있고, 의견이 달라서 듣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강압적으로 한 번에 말을 듣지 않으면 엄벌을 내리겠다는 공포심이 얼마나 오래가겠는가?


특히 딸들을 키울 때는 대화가 아주 도움이 되지만, 아들은 대화도 안 될뿐더러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만약 우리 집 같은 상황에서 아빠가 자녀에게 무관심하면, 아이들은 아빠를 잠깐 스쳐 가는 잔소리 정도로 치부한다.


그러면 아빠는 왜 아들이 말을 듣지 않는지, 아들이 참으로 모자라다고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본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망각적 동물이라 그런 것인지, 참으로 곁에서 보면 우스울 수밖에 없다.




현실적인 어려움들

더구나 취미 부자인 남편에게는 아들을 케어하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다. 남편은 성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당연하다. 성인 대 성인으로 대화가 되고 서로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데, 아들은 어리고 돌봐야 하기 때문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하는 방법은 아내와 함께 동참하되, 귀찮은 것은 아내가 아들을 케어하도록 해서 그 순간을 모면하려 한다.


우리는 참으로 우리가 자랐을 때의 환경을 생각하며 아이들을 키울 때 실수를 너무 많이 했다. 첫째로 아이들이 우리처럼 자주적으로 자랄 줄 알았다. 그래서 방치하면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이 될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우리가 과연 알아서 자랐을까? 학교, 주변 사람들, 가족의 영향을 받고 자랐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착각한다. 알아서 잘 컸다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남편이 잘 자란 것은 부모와 가정환경 덕분이다. 우리는 왜 그런 부모가 되어주지 못했을까? 우리 시어머니는 며느리도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뚜렷했다. 부족하고 가난한 예비 며느리를 받아들인 첫 번째 이유도 직장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여자가 큰 희생을 치러야 가정이 원만하게 꾸려진다는 가스라이팅이 시작된다.


정작 결혼하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나만 참아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어머니는 아들의 안위가 우선이니, 며느리가 힘들어 쓰러지건 말건 그건 천륜적으로 이해받을 수 없는 상황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네가 참아라, 네가 참아야 가정이 원만하다. 아내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 당연히 이런 말들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가 하필 70년대후반생이니 나름 교육이란 걸 받아버린 세대라, 이 불합리한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따지고 들어가니 이제는 "여자가 기가 세면 남편이 주눅 든다. 남자가 집에 기댈 곳이 없으면 외부로 눈을 돌린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나만의 방법 찾기

그렇다 보니 어느 날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니, 이미 남편의 사고방식은 고칠 수도 없고 바뀔 수도 없으니 내 선에서 아들을 어떻게 끈기 있게 키울 것인가를 고민해 보았다.


내가 남자였다면 아들과 축구를 하든 스포츠를 함께 했을 텐데, 키가 160센티에 체구가 작은 나는 운동에 쏟을 에너지가 정말 부족했다. 앞서 말했듯 가사노동, 맞벌이, 독박육아는 아이언맨이 와야 가능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렇다. 내가 아이언맨이 아닌데 어떻게 아들을 스포츠 맘으로 키울 수 있나?

물론 앉아서 정적으로 키우는 방법도 있다. 그것도 부부가 합심하여 정적으로 키우려면 가능하다. 하지만 테이블에 앉아서 아들 숙제를 봐주고 있으면, 남편은 갑자기 옆에 앉아 기타를 친다. 정말로 기타를 치니 아들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기타를 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집안 분위기가 좋아서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니 기타를 붙잡고 연주를 하는 것이다. 7080 음악을 연주하니 시끄럽고 방해만 될 뿐이다. 무엇이든 분위기와 눈치가 필요하기 마련인데 집이니 남편은 얼마나 눈치 볼 필요 없고 자기감정에 충실한가?


다시 정적인 분위기, 실패한 이유가 또 있다. 아들의 숙제를 봐주고 있는 테이블 위에서 나의 언성이 조금 나왔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끼어들더니 "애를 교육을 억지로 시키지 마, 다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어"라며 본인의 교육관을 일장연설한다.


그러면 아들이 듣기에 얼마나 달콤한 말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결국 아들은 게임 중독자가 되었다.

남편은 여전히 자신의 과거를 잊고 현재만 사는 사람이라, 이 훌륭한 인류는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한다. 아들이 못난 것도 우리 부부 탓이라고 쌍가락지를 손가락마다 다 껴서 나를 끼워 앉고 입수하자는 꼴이다.

물론 나의 부족한 탓이 결과로 보였겠지만...




등산이라는 해답

말이 길어졌는데, 내가 산 정상을 4번 간 이유를 설명하려면 집안의 배경이 필요해서다.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아들의 사춘기 시작이고, 이제 어떻게 이 아이를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키울지가 나의 큰 숙제였다.


용돈을 주고 알아서 시행착오하라는 남편의 교육관은 지금 이 현시점에서 전혀 맞지 않는다. 아이들은 우리 때와 다르게 엄청난 풍요를 누리고 있다. 또 풍요 속의 빈곤 시대이기도 하다. 물질적 채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내적 충만함이 받쳐줘야 하는데, 먹는 것, 사는 것 모두 일시적이고 게임으로 계속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게임 속과 현실은 아직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다. AI가 더욱 발달하면 그 경계가 모호해지겠지만, 아이는 지금 이 현시점의 세대이기 때문에 현실과 게임의 경계를 알려줘야 했다.


아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기본 저력을 만들어줘야 했다. 이것은 인위적이고 의도된 접근이다.

아들을 게임에서 벗어나 현실의 재미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성취감도 일깨워주고 싶었다.


자신이 아무것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일어서고 싶을 때 더 힘들어질까 봐, 어차피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더라도 나는 이 아이에게 지구력과 끈기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남편에게 우선 스포츠 대디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지만, "널 닮아서 애가 이 모양이다" 혹은 "지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야지 내가 왜 끼어드냐"면서 한심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남편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는 아들과 수영을 등록했다. 새벽 6시 수업을 6개월 정도 들었는데, 그 뒤에 코로나가 터지면서 단체 운동이나 집단으로 만나는 것이 사회적으로 금지되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방침으로 나는 수영을 그만둬야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산'이었다.



끈기 있는 설득의 과정

등산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몇 달을 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정상을 찍으면 '5만 원'을 준다는 보상도 분명히 제시하며, 아들이 엄마와 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에 급하게 1살 많은 사촌형을 매수했다. 선입금 3만 원에 같이 정상에 도착하면 각각 5만 원씩 준다고 하니 아이들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끈기 있는 자만이 결국 여신이 손을 들어준다.


생각해 본다는 것은 반 정도는 넘어왔다는 것이다. 설득은 시간이 필요하다.


5학년 때 황매산 정상을, 중학교 1학년 때는 월출산을, 중학교 2학년 때는 무등산을, 중학교 3학년 때는 제주도 한라산 정상을 찍었다.




함께한 등산의 기억들

정상까지 갈 때는 나도 괴로웠지만, 더욱 괴로운 것은 아들의 투덜거림이었다.

그래서 10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아들을 두고 먼저 올라가서 아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들은 엄마가 나를 버리고 갔다는 생각에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그리하여 정상까지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완주했다.


사촌형과 갈 때도 나는 아들들 2명의 김밥과 물까지 내 배낭에 넣고, 아이들은 물 한 병으로 편하게 올라가도록 편의를 봐줬다. 3인분의 간식과 물, 식사까지 챙겨가니 내 짐은 거의 15킬로 압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고, 남편이 내 계획은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부수고 싶었으므로...




한라산에서의 감동

최종적으로 제주도 한라산 백록담을 찍었을 때 우리는 그 성취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금요일 밤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하여 렌터카를 빌려 숙소에서 잠깐 잠을 자고, 다음날 새벽 4시에 성판악으로 운전해 갔다. 새벽 5시부터 입산을 하기 시작했으니, 조카와 아들 둘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야 했는지 모른다.


각각의 배낭에 물과 간식, 도시락, 우의를 챙겨서 입산을 시작했는데, 길은 원만하고 좋았으나 많이 걸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아이들은 진달래대피소에 도착하여 기다렸다가 일부러 좀 잠을 자도록 했다. 30분 정도 우의를 덮고 잠든 아이들이 일어나더니 먼저 일어난 사람부터 다시 정상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들은 더 자고 싶다고 조르니 우선 더 재우기로 했는데, 아들의 머릿속에는 백록담까지 비가 와서 입산 금지가 되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서 웃기기도 하고 이 정도에서 돌아가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들은 한 시간을 자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하거니와, 비는 오지 않아서 여전히 백록담까지 길은 열려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진달래대피소에 아들을 두고 혼자 걸어갔다.

그러면 아들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꾀를 부릴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따라올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백록담에 도착하니 조카는 이미 도착하여 간식을 먹고 있었고, 눈앞에 구름들로 백록담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우리는 낙담하여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들도 백록담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워하며 하산을 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아들과 통화를 하며 어디쯤 왔는지 서로 위치를 파악하며 아들이 백록담까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눈앞에 큰 곰 한 마리가 머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들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멀리서 환호성이 들렸다. 마치 아들을 환영하는 것 같은 환호성이었으나 그게 아니고, 구름이 빛의 속도로 흘러가며 장막이 걷히고 광활하고 경이로운 백록담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표정에서 갑자기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백록담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팔을 휘저으며 아들에게 빨리 올라오라며 소리를 지르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들과 조카를 양쪽에 끼고 나는 백록담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아이들은 생애 처음 성취감을 느꼈을 것이고, 비록 그 감정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부디 아이들이 살면서 힘이 되는 추억이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관음사로 하산하면서 나는 저혈당으로 쓰러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숙소에 도착했다.



그 후의 변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고?

조카는 지금 군대에 가 있지만 누구보다 운동을 좋아하고 수영을 즐기며 산을 잘 타게 되었다. 아들도 고등학생이 되면서 집 근처 산에 한 번씩 같이 올라가기도 했지만, 대학생이 되자마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헬스장을 이용하고 대운동장에서 뛰거나 걷기 운동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아이 다 게임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게임만 해서는 자기 조절력이 생길까?

몇 번의 등산 경험이었지만 아이들은 땀을 흘리며 성취감을 느꼈고, 그리고 스스로 자기 조절력을 키워가는 중이다. 작은 목표를 이룬 경험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더 큰 목표를 향해 걸어가게 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적어도 이렇게라도 경험이 쌓이는 것이 차라리 실패했노라고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도하는 행위 자체로도 아이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만든 자기 조절력은 결국 나를 원만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해주는 밑거름이기도 해서, 스스로 잘 절제하면서 행복감과 평정심 그 균형을 알맞게 찾아가는 인간이 되길 바랄 뿐이다.


또한 남편은 두 번 다시 나에게 등산에 대한 어떠한 조언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나는 박지성이 한일전 때 골을 넣고 조용히 관중을 향해 시선을 두며 뛰어오르는 그 느낌을 조금 이해가 간다.

묘한 승리감이 온 순간이었다. 아들을 위해서 였지만 결국엔 내가 변화하고 깨어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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