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를 저당 잡는 부모, 흔들리는 자녀의 미래

사교육비는 사상 최고인데, AI는 일자리를 지우고 있다

by 우드코디BJ

서울 어느 영어학원 대기실. 네 살짜리 아이가 시험지를 받아 든다. 아이는 아직 연필을 제대로 쥐는 법도 모른다. 그 옆에 앉은 부모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이 장면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이 장면을 만들어낸 구조를 보려는 것이다.


국회는 지난 3월 12일 학원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유아를 대상으로 모집이나 수준별 배정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과 평가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이다. 이른바 '4세·7세 고시'를 막겠다는 것이다. 법이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사회의 자화상이다.


국가데이터처·교육부가 발표한 '2025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는 표면적으로 희소식처럼 보인다. 사교육비 총액이 27조 5천억 원으로 전년 대비 5.7% 감소했다. 5년 만의 감소다.


그러나 이 숫자를 희소식으로 읽는 순간, 숫자가 숨긴 진실을 놓친다. 학생 수가 513만 명에서 502만 명으로 12만 명 줄었다. 배울 아이들이 사라진 것이지, 교육 열풍이 꺾인 것이 아니다.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만 놓고 보면 1인당 월평균 지출이 60만 4천 원으로 오히려 2.0% 올랐다. 명목 기준 역대 최고다. 배울 아이는 줄었고, 한 아이에게 쏟는 돈은 늘었다. 열기가 식은 게 아니라, 좁은 곳으로 몰린 것이다.


서울시교육청이 학부모·학생·교사 2만 5,48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첫 사교육 인식 설문조사는 그 민낯을 드러낸다. 유·초·중 자녀를 둔 학부모 응답자 1만 606명 중 49%가 답했다. 본인 노후가 위태로워지더라도 사교육비를 줄이지 않겠다고. 절반의 부모가 자신의 미래를 저당 잡고 있다. 이것은 교육열이 아니다. 내 아이만은 이 줄에서 밀려나지 않겠다는, 벼랑 끝의 다짐이다. 그 다짐이 네 살짜리 아이를 시험장에 세운다.


그렇다면 부모들이 그 노후를 바쳐 아이를 밀어 넣으려는 곳은 어디인가. 변호사, 회계사, 애널리스트, 컨설턴트. 안정적인 소득, 사회적 인정, 계층 유지. 그 목적지를 향해 아이는 4세부터 달려야 한다.


조용한 분할화면_ 부모의 재정과 아이.png 서울 학부모 절반은 "노후가 위태로워져도 자녀 사교육이 먼저"라고 응답했다


그런데 그 목적지가 이미 8년 전에 해체 예고된 자리라면 어떻게 되는가. 2017년, 서울대 유기윤 교수 연구팀은 2090년을 시뮬레이션했다. 그 미래에서 계급을 가르는 기준은 학력도, 전문성도 아니다. 어떤 플랫폼을 소유하느냐, 아니면 그 플랫폼의 어느 자리에 서 있느냐다. 최상층에는 플랫폼 소유주가 있다. 그 아래 정치 엘리트와 예체능 스타, 소수의 창의적 전문가로 이루어진 플랫폼 스타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절대다수의 시민들은 플랫폼에 접속해 프리랜서처럼 살아가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다. 불안정을 뜻하는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 연구팀이 제시한 이 계층의 비중은 99.99%다. 부모의 노후를 담보로 아이들에게 사주려는 그 티켓의 도착지가, 99.99%의 자리다.


당시 이 연구는 학계 밖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런데 2022년 11월, ChatGPT가 공개되며 생성형 AI 시대가 개막됐다. 그 순간부터 쏟아진 연구들이 겨냥한 곳은 하나같이 같았다. AI가 잠식해 들어가는 화이트칼라의 일자리 문제였다.


미국의 투자 리서치 회사 시트리니리서치(Citrini Research)의 James van Geelen과 Alap Shah는 2026년 2월 22일, 2028년 6월을 가상의 시점으로 설정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미래에서 온 편지 형식을 띤 이메일 뉴스레터였다. 내용은 차갑다. 보고서의 시나리오에서 초고성능 AI 도구는 기업 운영, 코딩, 법률 검토, 회계, 고객 관리 등 지식 노동 전반을 빠르게 잠식한다.


기업들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AI 도입을 가속화하고, 그 결과 안정적 소득을 바탕으로 주택담보대출과 소비를 떠받쳐온 중산층 전문직 고용이 흔들린다. 소비가 줄면 기업은 다시 비용 절감을 위해 AI 투자를 늘린다. 해고가 해고를 부른다. 보고서는 이것을 두고 '일단 미끄러지면 멈출 수 없는 내리막'이라고 불렀다.


이 충격은 고용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이의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자신의 노후를 태우고 있는 부모들에게 이 경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희망의 근거가 흔들리고 있다. 목적지가 흔들린다면, 적어도 안전한 우회로라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우회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Gemini_Generated_Image_1p947k1p947k1p94.png 시트리니 리서치가 내놓은 보고서는 'AI發 화이트칼라 일자리 붕괴' 시나리오를 담고 있다


시트리니 보고서가 그린 시나리오는 화이트칼라에서 밀려난 이들이 흘러드는 곳을 배달과 차량 호출 같은 플랫폼 노동으로 서술했다. 그런데 산업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고용영향 사전평가: 2025 AI·디지털 전환' 보고서는 인간과 AI 기술이 가장 먼저 정면으로 대치할 분야로 정확히 그 자리, 자율주행의 영향을 받는 육상운송업을 지목했다.


이미 숫자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육상 여객 운송업에서 2020년에서 2023년 사이 매출은 39% 증가했지만 고용은 8% 감소했다. 소화물 전문 운송업에서는 2023년 단 한 해 만에 고용이 62% 폭락했다. 생산이 소폭 하락하는 사이 고용이 절반 이하로 주저앉은 것이다. 시트리니가 시나리오로 그린 그 미래가, 산업연구원의 보고서에서는 이미 데이터로 기록되고 있다.


밀려난 사람들이 내려설 마지막 사다리마저 이미 자동화의 표적이 되고 있다. 자율주행이 오기도 전에, 시장은 그 방향으로 이미 달리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빠르게 닥칠지는 산업연구원 보고서는 뚜렷하게 언급했다. 보고서는 AI로 인한 고용 충격을 '대규모 구조조정이 한꺼번에 터지는 방식'으로 규정하며, '지진과 같은 이벤트로 급작스럽게 발현될 가능성'을 경고했다. 기술이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한꺼번에 터진다. 평온해 보이는 지금이 오히려 위험하다.


산업연구원은 이미 그 전조를 데이터로 보여줬다. IT 업계와 디자인·광고기획 분야에서 2023년 중반을 기점으로 20대 고용이 뚜렷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30대 고용은 여전히 증가하는데, 20대만 꺾인다. 보고서는 이 현상이 저출산 같은 인구 구조 변화와는 직접적 관련성이 미약하다고 판단한다. 신입이 하던 일을 AI가 대신하고 있다는 뜻이다. 4세부터 준비해 온 그 출발점, 전문직으로 향하는 첫 번째 계단이 이미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사회로 진출하는 입구가 또 하나 닫히고 있다.

ChatGPT Image 2026년 3월 19일 오후 04_15_02.png 산업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인공지능에 의한 일자리 대체 현상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이 교육을 지탱하는 한국 부모들의 자산 구조는 이 불안을 더 고조시킨다. 2024년 기준 한국 가계 자산의 64%가 부동산에 묶여 있다. 미국은 32%, 일본은 36%다. 65세 이상 고령 세대는 80~90%가 부동산이다. 움직일 수 있는 돈이 거의 없다. 그 움직일 수 있는 돈마저 지금 사교육 시장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는 이런 말을 남겼다. 경기가 좋을 때 사람들은 낙관하고, 낙관이 빚을 키운다. 빚이 한계에 닿는 순간, 누군가 먼저 팔기 시작한다. 그 순간을 '민스키 모멘트'라고 불렀다. 그가 살아 있을 때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를 다시 불러낸 건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발단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즉 미국 내 주거용 부동산 담보 대출의 붕괴였다.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낙관이 빚을 키웠고, 그 낙관이 무너지는 순간 시장 전체가 무너졌다. 민스키가 경고한 바로 그 구조였다.


지금 한국의 부동산 시장은 그 구조와 무척 닮았다. 가계 자산의 64%는 이미 부동산에 묶여 있다.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1,200조 원을 넘어섰고, 연체율 0.45%는 10년 만의 최고치다. 금리 6.5%까지 치솟은 상황에서 아직 버티고 있지만, 균열은 시작됐다.


노후 자산을 헐어낸 돈은 사교육비로 빠져나가고, 아이가 향하는 안정적인 일자리라는 희망은 AI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투자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쏟아붓는다. 1인당 사교육비가 역대 최고를 찍은 것이 그 증거다. 거품이 꺼지기 직전, 가장 많은 사람이 뛰어드는 것처럼.


여기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최고투자전략가 마이클 하넷이 지난주 2026년 3월 13일 뉴스레터에서 경고를 더한다. 그는 현재 자산시장 흐름이 2007년 중반부터 2008년 중반까지와 '불길할 정도로 가깝다'고 썼다. 고유가, 사모대출 불안, 스태그플레이션과 중앙은행의 정책 실기 가능성. 그가 짚은 닮은꼴이다.


한국의 사정은 이미 2008년 당시를 한참 넘어섰다. 2008년 말 688조 원이던 가계부채는 2025년 말 1,978조 원을 넘어섰다. 국가채무는 309조 원에서 1,300조 원 안팎으로 네 배 가까이 불어났다. 2008년 3조 원대였던 주식시장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2026년 2월 말 기준 32조 원을 넘어섰다. 10배에 육박한다. 빚더미는 더 커졌고, 버팀목은 더 약해졌다.


같은 파도가 더 높은 곳에서 오고 있다. 노후 대비도 미루며 사교육 시장을 달구는 부모의 절박함. AI 시대에 이제 막 흔들리기 시작한 일자리의 풍경. 오늘의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 그리고 4세·7세 고시를 치른 아이들이 스무 살 이후 마주할 세계. 이 모든 미래를 걱정하기 이전에, 더 가까운 질문이 하나 있다.


아이들이 노동시장에 들어서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빚의 무게에 무릎 꿇는 것은 아닌가. 아이의 미래를 지키겠다며 오늘을 저당 잡는 사회. 내일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한국판 민스키 모멘트라면, 우리 아이를 기다리는 것이 AI가 잠식한 일터라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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