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 경험 67.6%, 인성 9.2%'라는 숫자가 던지는 문해력 테스트
올봄 기사들은 비슷한 문장을 반복했다. 기업은 직무 경험을 중시하고, 청년 일자리는 줄고, AI는 일자리를 바꿀 것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그 문장들이 너무 쉽게 이해된다는 데 있다. 기사는 사실을 전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에 숨어 있다.
우리는 디지털 문해력과 AI 문해력, 금융·미디어 문해력을 말한다. 그런데 정작 그 모든 판단의 바탕이 되는 사회를 읽는 힘은 얼마나 길러왔는가. 숫자 뒤의 구조를 읽고, 기사 문장 뒤의 이해관계를 읽고, 개인의 실패처럼 보이는 장면 뒤에서 사회가 오래 지워온 훈련의 결핍과 진입 구조의 붕괴를 읽어내는 힘. 지금 우리에게 더 부족한 것은 어쩌면 그런 사회 문해력인지도 모른다.
직무 경험이라는 가면
수시 채용이 보편화된 시대에 기업이 말하는 ‘직무 관련 업무 경험’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뜻한다. 거기에는 단순한 실무 숙련도만 들어 있지 않다. 조직 안에서 일정 기간 버텨본 적이 있는가. 협업의 리듬을 아는가. 보고와 피드백의 문법을 익혀본 적이 있는가. 불편한 사람과도 일을 이어가 본 적이 있는가. 갈등 앞에서 곧바로 무너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켜본 적이 있는가. 지난 수년간 청년 세대의 조기 퇴사와 이탈을 경험한 기업과 기관은 그 모든 것을 함께 읽어내려 한다.
이 점에서 직무 경험은 명확한 설명이라기보다 두꺼운 가면에 가깝다. 겉으로는 직무 역량을 점검하는 표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직 생활과 대인관계의 이력을 보겠다는 뜻에 가깝다. 기업이 진짜 확인하려는 것은 ‘일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조직 안의 긴장과 마찰을 지나며 자기 몫을 감당해 본 사람에 더 가깝다.
한 경제단체 설문조사에서 기업이 채용 시 가장 중시하는 요소로 '직무 관련 업무 경험'이 67.6%로 가장 높았고, 소프트 스킬인 대인관계 기술은 9.2%에 그쳤다. 숫자만 보면 실무 경험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하다. 그러나 대인관계 기술은 중요하지 않아서 뒤로 밀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질 좋은 직무 경험을 몇 년간 안정적으로 쌓기 위한 전제 조건에 가깝다.
기업은 ‘사회성’이나 ‘인성’을 별도 항목으로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미 직무 경험이라는 큰 필터 안에서, 그 사람이 관계를 견디고 조율할 수 있는지 함께 읽으려 한다. 채용의 언어는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화의 격차를 측정하는 언어가 되어가고 있다.
경제단체의 보도자료는 이런 복합적인 판단을 '직무 경험'이라는 단정한 언어로 압축한다. 언론은 그것을 기사 문법에 맞게 다시 옮긴다. 독자는 그 문장을 다시 경력의 문제로 읽는다. 사실이 틀린 것도 아니고, 의도가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입체적인데, 기사 문장은 종종 그것을 납작하게 번역한다.
불편을 통과하는 힘은 어디서 약해졌나
사람은 관계 속에서 저절로 성숙해지지 않는다. 함께 부딪치고, 서운해하고, 오해를 풀고, 다시 말을 거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란다. 넘어지지 않아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경험을 통과하며 단단해진다. 관계를 버티는 힘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타고나는 성격이 아니라, 불편함을 지나며 익히는 기술에 가깝다. 그런데 그 불편함을 충분히 겪게 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수년간 인기를 모아 온 육아 상담 콘텐츠와 여러 양육 서사는 같은 불안을 비추어왔다. 좌절을 견디는 힘, 훈육 속에서 감정을 다루는 힘, 관계의 불편함을 통과하는 힘이 약해졌다는 진단이었다. 여기에 비교의 문화가 겹쳤다. 부모의 불안은 아이를 믿고 기다리는 힘보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 하는 강박으로 자주 흘렀다. 비교는 아이를 키우는 언어가 되었고, 그 언어 안에서 자율성은 점점 더 얇아졌다.
이것은 특정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북유럽 청년들이 평균 21세 전후로 독립하는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결혼 전까지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여전히 자연스럽다. 물론 높은 주거비와 불안정한 고용이 독립을 어렵게 만드는 현실도 있다. 그러나 경제적 조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상처를 덜 입게 하려는 보호, 실패를 미리 제거하려는 배려, 갈등을 대신 정리해 주려는 개입은 아이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압력이 누적될수록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다루고 관계를 복원하는 경험은 줄어든다. 마음의 상처를 막아주려던 보호가 때로는 상처를 다루는 법까지 함께 지워버린 셈이다.
좁아진 입구를 먼저 통과한 AI
조직은 혼자 일하는 공간이 아니다. 협업과 갈등, 보고 체계, 상하 관계, 피드백, 서운함과 조정이 끊임없이 오가는 공간이다. 수시 채용이 늘수록 조직은 처음부터 이런 구조를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된다. 그래서 기사에는 ‘직무 경험’이라고 적히지만, 조직이 실제로 읽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가, 어떤 긴장과 충돌을 겪었고 그 안에서 어떻게 자기 자리를 유지했는가에 더 가깝다. 이 질문은 이력서에 직접 적히지 않지만, 조직은 늘 그것을 읽으려 한다.
문제는 이제 관계를 배울 기회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일을 배워볼 첫 기회, 탈락의 이유를 학습할 기회, 다시 도전할 감각을 회복할 기회까지 함께 줄어들고 있다. 정기 공채가 기본값이던 시대는 빠르게 저물고 있다. 한때 공채는 단지 선발 방식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을 뽑아 함께 길러내는 구조이기도 했다. 초반의 서툼과 시행착오를 조직이 일정 부분 감당했고, 신입은 그 안에서 인간관계와 일의 문법을 동시에 배웠다. 비효율은 있었지만, 적어도 처음 들어가 배워볼 입구는 있었다.
지금은 그 입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대규모로 뽑아 함께 길러내기보다, 필요할 때마다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 데려오는 수시·상시 채용이 더 일반적인 풍경이 됐다. 공채의 종말은 단지 채용 방식의 변화가 아니다. 기업이 초보자를 길러내는 비용을 줄이고, 검증된 사람을 더 선호하게 됐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 AI 전환까지 겹친다. 관계를 배워볼 첫 조직, 일을 배워볼 첫자리, 탈락 이유를 학습할 피드백 구조가 동시에 약해지는 상황에서 AI 전환은 진입 장벽을 더 높인다.
사회는 청년에게 첫 경험을 줄 준비는 하지 않으면서, 첫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그들을 더 정밀하게 걸러내기 시작했다. 기업은 여전히 직무 경험을 요구하지만, 정작 청년이 그 경험을 처음 쌓을 수 있는 입구는 점점 좁아진다. 더 잔혹한 것은 그다음이다. 선발 과정은 점점 더 정교해지는데, 탈락의 이유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다. 지원자는 무엇이 부족했는지, 어떤 기준에서 밀려났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채 탈락을 반복한다. 선발은 고도화되고, 실패 경험은 쌓이지만, 학습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 결과 이미 조직 경험을 쌓은 청년과 이유도 모른 채 쉬는 시간이 길어지는 청년 사이의 격차는 단지 경력의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 피드백의 차이, 교정의 차이,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감각의 차이로까지 벌어진다. 쉬었음, 고립, 은둔의 문제를 기업의 채용 축소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청년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돌릴 수도 없다. 대인관계 기술과 감정을 견디는 힘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사람을 아무 지원 없이 일터에 밀어 넣는 것은 해법이라기보다 재이탈의 예고에 가깝다. 그러나 통계청 자료가 보여주듯 쉬었음 인구는 늘고 있다. 원인 분석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더 깊이 고립된다.
청년기에 사회로 진입하지 못한 문제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경제인협회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6년 초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은둔 청년은 약 53만 8000명으로 전체 청년의 5.2%에 달하며,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5조 2870억 원에 이른다. 가족이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문제가 버텨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년기 은둔이 중장년으로 이어지는 상흔 효과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더 깊어지고, 더 늦게, 더 비싼 비용으로 돌아온다.
행간을 읽는 힘, 사회 문해력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정보가 무엇을 압축하고 무엇을 지우는지 읽어내는 힘이다. 숫자 뒤의 구조를 읽고, 기사 문장 뒤의 이해관계를 읽고, 개인의 실패처럼 보이는 장면 뒤에서 사회가 오랫동안 지워버린 훈련의 결핍과 진입 구조의 붕괴를 읽어내는 힘. 그것이 사회 문해력이다.
‘직무 관련 업무 경험’이라는 문장을 보고 곧바로 실무 능력의 문제만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이미 설계된 언어 안으로 들어간다. 청년의 고립을 개인의 나약함으로만 읽고, 조직의 채용 기준을 중립적 능력주의로만 읽고, 부모의 불안을 사랑의 과잉으로만 읽는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AI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것을 기술 주권과 생산성의 문제로만 읽는다. 어떤 모델을 만들 것인가, 어떤 산업이 앞서갈 것인가를 묻는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친다. 초고령사회에서 어르신의 외로움과 고립을 덜기 위한 대화형 AI와 돌봄 기술은 점차 공적 서비스의 언어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반면 사회적 관계 역량을 기를 기회를 잃은 청년에게 필요한 AI는 아직 공적 언어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것은 관계를 대신하는 AI가 아니라, 보고와 피드백, 협업과 갈등, 거절과 수정의 순간을 반복 연습하게 하는 AI다. 국가가 AI에서 무엇을 먼저 상상하는지가, 누구의 고립은 아직 공적 의제가 되지 못했는지를 보여준다.
사회 문해력의 부족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다. 구조를 읽지 못할수록 사람은 불안과 조급함에 더 쉽게 흔들리고, 그 흔들림은 삶 전체의 균열로 번지기 쉽다. 실패는 수치심이 되고, 수치심은 고립이 된다. 사회를 읽는 감각을 잃을수록 다시 연결되기도 어려워진다.
기사를 읽는 일은 쉬워졌다. 정보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행간은 오히려 얇아졌다. 그래서 사회를 읽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