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우드워커로 살아남기
나는 공방 한구석의 자투리 나무처럼 막연한 가능성의 조각들만 미련하게 쌓아가고 있는 중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한 번 갖다 버려야 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내가 뭔가 만들고 남은 조각들을 쌓아가는 한, 완성되지 않은 내 진행형의 성취는 이어질 거라고 믿는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자투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 낸 제작의 경험들이니까. 나는 가구를 만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구만 만들어낸 것은 아닐 것이다.
자투리나무의 잠재력
공방 한구석에 자투리 나무들을 쌓아 두는 공간이 있다. 재단하고 남은 부분 중 버리기 아까운 조각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새 나무를 재단하기 애매한 작은 부품이 필요할 때 쓸만한 것이 있나 뒤적거리기 위해서다. 반대로 자투리 모양을 보고, 그걸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기도 할 요량으로 쌓아두기 시작했다.
자투리를 사용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번거로운 일이다. 작업이 밀려있는 와중에 더미를 뒤적거려 알맞은 모양을 찾느니, 새 재료에서 다른 부품들과 함께 설계하고 재단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약간의 재료비보다 시간을 절약하는 편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작은 조각일수록 가공할 때 더 위험하기도 하다. 보관한 지 오래되었거나 구매 시기가 다른 나무들은 같은 수종이라도 미묘하게 색감이나 무늬가 달라 거슬릴 때도 있다. 자리를 차지하고 계속 쌓여만 간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이런 이유로, 공방이 복잡해지기 시작하면 언제 사용하게 될지 모르는 이 자투리 나무들부터 과감하게 폐기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자투리에는 지금은 특정할 수 없는 가능성이나 잠재성이 있지만 그것이 언제 발현될지는 알 수 없다. 기회가 잘 맞는다면 딱 맞게 활용할 수 있다 해도, 여차하면 그전에 버려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나도 스스로에 대한 막연한 가능성만을 기대하고 잉여의 부산물을 쌓아 올리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확실히 해내거나 크게 터뜨리는 것 없이 가능성의 조각들만 미련하게 쌓아가고 있는 중일수도 있다. 그리고 일이 안 풀릴 때면, 그 조각들을 언제까지 붙들어 매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한 번 갖다 버려야 하지 않나 생각하기도 한다. 지금이 버릴 때인가? 종종 고민한다.
나는 불완전한 성취를 이어가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희뿌연 희망의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까마득한 가능성의 더미를 뒤적거리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허나 결국 버리게 되더라도 최소한의 잠재성을 환기하는 계기는 되리라. 앞으로도 계속 내가 뭔가 만들고 자투리 나무들을 쌓아가는 한, 완성되지 않은 내 진행형의 성취는 이어질 거라고 믿는다. 진짜 중요한 것은 자투리 자체가 아니라 그 자투리를 만들어 낸 제작의 경험들이니까. 나는 가구를 만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구만 만들어낸 것은 아닐 것이다.
다람쥐와 기계
나는 사업자명과는 별도로 작업 공간에 '다람쥐와 기계'라는 이름을 장난 삼아 붙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좋아하는 것들 두 개를 단순 병치한 이름이다. 다람쥐도 근사하고, 기계도 귀엽고. 아니, 일반적으로는 다람쥐가 귀엽고 기계는 멋있지. 간혹 다람쥐가 나 자신을 뜻하는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귀여운 동물에 스스로를 치환하기 힘들어하는 중년 남성이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둘 중에 기계 쪽을 담당하고 있다. 목공방의 나날들은 얼핏 보면 마음껏 돌아다니는 다람쥐처럼 자유분방해 보이나, 사실은 기계 같은 단순반복 업무의 연속이기도 하다.
도토리를 묻어놓고 잊어버린 다람쥐의 건망증이 숲을 만든다는 이야기는 매우 낭만적이다. 하지만 다람쥐에게는 숲의 창조자가 되기보다 눈앞의 도토리 하나가 더욱 간절했을 수도 있다. 도토리를 잃어버리고 겨우내 주린 배를 잡고 자책했을까? 저 다람쥐처럼 내가 인식할 수 있는 동안에 엄청난 성취를 느낄 일은 아마 없을 것 같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나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부가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중이었으면 좋겠다.
개와 도깨비풀
가끔 우리집 개를 데리고 공방에 간다. 성격이 몹시 번잡하므로 자주 그러지는 못한다. 기계작업이 없거나 작업실 정리하는 날에야 가능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실내로 다시 들어가는 것은 오는 내내 멋진 산책을 기대한 이 작은 생물에게 몹시도 당혹스러운 일이기에, 공방 앞의 공터에서 최대한 힘을 빼고 들어간다. 개들은 풀숲을 뒤지는 것을 좋아한다. 한참을 킁킁대다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면, 목덜미에 도깨비풀 씨앗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털을 골라 풀씨를 떼어 멀리 던지면서 생각한다. 도깨비풀이 이런 방식으로 영토를 늘려 나가는 것은 누대에 걸친 도깨비풀의 설계이지 개의 즉흥적인 선의는 아닐 것이다. 개가 덤불을 헤집고 뛰놀고 놀이하는 사이 도깨비풀은 번진다. 꿀을 얻기 위해 벌들이 꽃잎을 뒤적거리는 사이 꽃은 퍼져나간다. 숲과 풀들을 펼치고 번성하게 만드는 의도치 않은 동작들이 있다. 당사자들은 모르겠지만 그 작은 행위들은 더없이 소중하다. 돈을 벌거나 즐거움을 얻기 위해 가구를 만드는 내 사적인 동작들도 결과적으로는 어떤 큰 무언가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다람쥐도, 개도, 꿀벌도, 나도 있는 힘껏 눈앞에 놓인 일을 할 뿐이다.
그저 계속 만들겠습니다
지금 나에게는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거창한 작업실이 생겼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만큼의 수익이 거기서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다시 나의 지향점은 역설적이게도 목공으로 돈을 벌지 않는 것이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나의 목공을 거친 경제활동의 전장으로 내몰지 않고 즐거움만 존재하는 영역으로 유지하고 싶다. 그 상태에 언제 다다를 것인지, 다다를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계속 그래왔듯이 무심하고 치열하게, 아주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와중에 가능성이나 잠재력 같은 것들이 나도 모르게 마법처럼 작용하여 어떤 부가적인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그 숫자만큼 다양한 작가적 성정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현실 생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온전히 자신만의 활동에 몰두할 수 있는 각자의 공간은 어디쯤 있을까? 나는 그것이 지금도 같은 공간에 겹쳐져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다른 세계의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이상을 좇아 계획을 세우고, 시도하고, 실패하고 빙빙 돌아왔다. 하지만 사실 현실과 생업과 이상과 구원 따위는 내가 있는 한 공간에 입체적으로 중첩되어 있고, 그중 어떤 층위에 존재할 것인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임을 서서히 깨닫는다. 앞선 이야기들을 복기해 보자. 시간의 결이 켜켜이 쌓여 나무 덩어리 안에 긴 이야기를 간직한다. 수많은 직선과 직각의 끝이 서로 만나 가구라는 하나의 작은 입체 공간을 완성한다. 재단을 끝낸 앙상한 뼈다귀 같은 판재들이 복잡하게 겹쳐 서서 다시 깊은 숲을 만들어낸다. 완벽한 마감제를 찾는 여행의 끝은 결국 시작점과 닿아 있다. 결국 가구를 만들며 내가 바라마지 않던 것들은 생각처럼 멀리 있지 않았다. 그것을 찾는 것은 현실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다른 차원의 층계로 비장한 모험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일상 속에 모호하게 중첩되어 있는 구원과 실현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멋진 가구를 만들어내고 싶었으나 회사에 다니느라 시간이 없어서, 작업 공간이나 장비가 부족해서 등 게으른 나를 보호하던 모든 구실이 지금은 다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저 묵묵히 나 자신을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또 한편으로는 팔리는 가구를 만들어 판매하고, 임대료를 납부하고, 재료를 구매해야 한다. 밤의 작업실은 적막하고, 오늘도 계속해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