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 귀뚜라미, 장지뱀
인간의 경계
인간세상의 경계는 선으로 나뉜다. 담, 울타리, 벽으로 그 선을 실체화해 비와 바람, 동물이나 곤충을 막고, 때로는 인간끼리도 막는다. 선을 그은 안쪽은 일반적으로 안전한 구역이다. 내 작업실은 풀숲 사이에 지어져 있는데, 철골을 세워 사방을 막고 그 안에 실내공간을 만들었다. 땅 위에 직사각형 박스를 그려 사람이 들어설 곳을 표시해 둔 모양새다. 이 안은 내가 주로 활동하는, 인간의 영역이다.
작업실 입구는 커다란 슬라이딩 도어다. 양쪽으로 열리는데, 문짝 하나가 폭이 2.2미터, 높이가 3.6미터씩이나 된다. 패널로 지어진 건물들이 다들 그렇듯 빈틈없이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래도 문은 문인지라, 작업실 안과 밖을 명확하게 구분 짓기엔 충분하다.
문이라는 것은 속성이 불명확해 보인다. 경계이자 동시에 통로 역할을 한다. 경계로 따지자면 쉽게 드나들게 만들어져 있고, 통로라고 생각하면 굳게 닫혀 있을 때가 많다. 닫혀있는 문은 안팎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때로는 열려 두 공간을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다시 공방 문 앞으로 시점을 이동해 보자. 풀과 나무가 우거진 이 일대에서, 저 커다란 문 너머는 인공의 기계들이 가득한 사람의 공간이다.
은신처
작업실에 도착하면 슬라이드문을 힘껏 밀어서 연다. 벽체와 같은 두께의 패널로 되어있어 꽤 묵직하다. 두 개의 문짝은 상단의 레일에 매달려 있는 구조라서, 아랫부분은 땅에 닿지 않고 살짝 공중에 떠 있다. 이 틈 사이로 빗물이나 바람이 들이치지 않도록 두꺼운 고무판이 덮고 있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물빠짐을 위한 굵고 긴 홈을 파놨는데, 슬라이드문이 닫히면 음습한 곳을 좋아하는 생물들이 여기로 모여든다. 어둡고, 축축하고, 좁고 긴 틈은 몸을 숨기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딱정벌레, 사슴벌레, 반딧불 유충, 지네, 귀뚜라미, 개구리 등 다양한 생물들이 여기서 발견됐다. 문을 열었을 때 몇몇은 잠이 덜 깨 느릿했고, 몇몇은 애초에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놈들이었다. (특히 반딧불 유충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다) 발견된 녀석들은 빗자루로 쓸어내거나 손으로 잡아 풀숲 아래 돌틈에 놓아준다.
때로는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잽싸게 몸을 숨기는 놈들도 있다. 문제는, 나의 예상과 달리 종종 공방 안쪽으로 뛰어든다는 것이다.
귀뚜라미와 지네
귀뚜라미는 습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닫힌 슬라이딩 도어 아래는 수풀 더미만큼이나 은신처로 완벽하다. 귀뚜라미라는 이름은 발음하기 귀여운 구석이 있고, 특유의 울음소리 덕분에 운치 있는 가을의 전령 정도로 여겨진다. 나쁘지 않은 대중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귀뚜라미의 새까만 몸통, 실같이 가느다란 더듬이, 꽁무니에 붙은 긴 꼬리털, 짧은 가시로 덮인 다리 모두 시각적으로 불편함을 준다. (산뜻한 초록색이었으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발발거리며 기어 다니기도 하고, 뒷다리 힘이 강력해 높이 뛰어오르기도 한다. 게다가 잡식성이라 풀잎이나 낙엽뿐 아니라 동물의 사체, 음식물쓰레기까지 아무것에나 들러붙는다. 문을 열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게 가장 기겁하게 만드는 지점이고, 특히 그 방향이 공방 안쪽이라면 더 그렇다. 공방 안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청소를 하다가 말라붙은 귀뚜라미 사체를 발견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지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생물이다. (저는 여기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주황색 머리와 청록색 몸통, 노란 다리의 독특한 배색과 더불어, 플라스틱을 연상케 하는 광택 있는 질감은 여느 생물들과는 다른 특이한 느낌을 준다. 지네는 긴 몸통을 좌우로 휘저으며 리듬감 있게 기어 다닌다. 몸통의 각 분절과 무수한 다리가 잘 고안된 태엽장치 장난감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탄성을 자아낸다. (진행 방향이 내 쪽이라면 다른 의미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한다)
지네가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 독이 있고 사람을 물기 때문이다. 눅눅한 곳을 좋아해서 신발 안에 들어가 있다가 발을 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봤다. 지네는 무작정 구석으로 파고들기 때문에, 발견하는 즉시 주저 말고 바깥으로 유도하는 것이 상책이다.
장지뱀
가끔은 장지뱀이 문틈 사이로 호다닥 숨어들기도 한다. 장지뱀은 도마뱀같이 생긴 작고 귀여운 파충류인데, 매우 민첩하게 움직인다. 낮에 활동하며 풀밭이나 돌틈에서 작은 곤충들을 잡아먹고 사는 건전한 생물이다. 하지만 때로는 잘못된 선택으로 공방의 음험한 문틈 사이에 몸을 숨기기도 한다.
이 상태에서 잘못 움직였다가는 공방 안으로 줄행랑칠 확률이 높기에, 나는 더 살기 좋은 반대쪽 공간에 갖다 놓기로 한다. 무작정 잡으려 하기보다는 방향을 잘 유도해서 손에 올린 뒤 이동시키는 편이 낫다. 무턱대고 집어 올렸다가는 꼬리를 끊고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꼬리는 이보다 더 유용한 곳에 사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손 위에 올리면 가늘고 기다란 여러 개의 발가락이 내 피부를 짚고 돌아다닌다. 무게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이 조그마한 생물이 거친 수풀 속에서 분주히 살아남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 한편이 찡하지만, 역시 이 녀석이 있을 곳은 밖이다.
이지선다
공방 문을 열면, 눅눅하고 어두컴컴한 곳에 몸을 숨겼던 생물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바깥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공방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나와 그들 모두에게 바깥이 더 나은 선택지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흙과 풀이 있는 세상과 콘크리트로 다져진 딱딱한 바닥 사이, 경계를 나눈 선 위에서 동물들은 종종 의아한 선택을 한다. 공방 구석에서 말라붙어가느니 가급적 바깥 세상에서 더 지내보라고 전할 방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공방에 도착해서 문을 열어젖히기 전에는 마음의 준비를 한다. 뭔가 놀라 달아난다면 재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다. 나는 매일 이 큰 문을 열고 인간의 영역 속으로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