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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덕호 Oct 07. 2024

동물들은 밤길을 걷고 있다

노루, 떠돌이개


밤길 위의 동물


제주에서 처음 구했던 작업실은 한라산 중턱에 있었다. 불빛은 고사하고 포장도 되어있지 않은 산길을 따라 600미터가량을 들어가야 했다. 밤에 이 길을 운전하다 보면 도로까지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차를 툭툭 치는데, 마치 누가 차체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가끔은 차 안에서 두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하는 이 좁은 비포장길 앞에 뭔가 나타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매번 머릿속으로 대응방식을 시뮬레이션하며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래도 그 길은 집에 가는 과정 중 일부일 뿐이고, 곧 빠져나갈 수 있기에 안도할 수 있었다. 


지금의 작업실은 왕복 2차선 도로에 접해있어 상황은 다소 나아졌다. 여전히 가로등도 드문 어두운 길이지만 미지의 무언가가 저 앞에 서 있다면, 차를 돌리거나 옆 차선으로 변경해서 빠르게 지나가기에는 충분하다. (정체에 따라 가차 없이 밀어버리는 선택지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여기는 낮에도 그렇지만, 어두워지면 더더욱 통행하는 차량을 보기가 힘든 곳이다. 공방에서 큰길까지 나가기 위해선 4km가량을 나 혼자 운전한다. 이 구간에는 옛날 안기부였다고 알려진 출입제한 구역과, 최근에 조성된 국가위성센터의 거대한 돔형 안테나들이 있어 위화감을 준다. 이 일대는 제주 4.3 당시 마을 주민들이 학살당한 비극적인 역사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실제로 어두운 도로 앞에 꿈틀거리는 뭔가를 목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노루, 오소리, 족제비 등 밤에 활동하는 동물들이다. 동물들은 겁도 없이 이 어둠 속을 홀로 잘 싸돌아다닌다. 




한밤의 노루 추격전


밤이면 이 구간은 가급적 빨리 통과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동물들 때문이다. 특히 길가에 서성거리는 노루들이 가장 성가신 존재들이다. 언제 도로로 튀어나올지 모르는 녀석들로 인해 속도를 줄이고, 항상 수풀 속에 뭔가 있지는 않나 살펴야 한다. 저 수풀 속에 희끄무레한 것이 마치 노루궁뎅이 같군, 하면 실제로 노루의 하얀 엉덩이일 확률이 높다.


늦게까지 작업을 마무리하다 보면 자정을 넘길 때가 많다. 야행성 동물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시간이다. 이놈의 노루들은 겁이 상당히 많고 조심스러운 생물이긴 한데, 위험요소를 분석하거나 도주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은 매우 부족하다. 도롯가에서 우물쭈물하다가도 차가 지나가는 타이밍에 딱 맞춰서 앞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도망친답시고 수풀로 뛰어드는 게 아니라 도로를 따라 차와 나란히 달려가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한참을 노루 뒤꽁무니를 쫓아 달리는 모양새가 된다. 나는 느긋하게 운전석에 앉아 노루궁뎅이를 관찰하고, 노루는 암만 뒤돌아봐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인간을 질색하며 내내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떠돌이개


밤길을 헤매는 개들도 간혹 있다. 낮에 돌아다니는 개들과는 다르게, 밤의 개들을 마주할 때는 특유의 낯선 야생성에 일단 경계하게 된다. 로드킬 당한 노루 사체를 정신없이 뜯고 있는 들개 무리를 보기도 했다. 그런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는지, 밤의 개들은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래 헤매던 개들은 사람을 경계해서 먼저 피하거나, 반대로 전혀 개의치 않고 제 할 일만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돌아다니는 (낮의) 동물들을 보면 불러서 먹을 것을 주거나, 만져보곤 한다. 길을 잃은 개들은 더러 잡아두었다가 주인을 찾아줄 때도 있다. (근래에는 어떤 계기가 있어서, 의식적으로 크게 관여하지 않지만) 그래서 차에 사료 샘플이나 간식 몇 가지는 늘 가지고 다닌다. 


어느 늦은 퇴근길에 깡마른 개가 지나가는 걸 봤다. 털도 지저분한 것이 오래 헤맨 행색이었다. 목줄도 있고 해서 잡아둬야 하나 생각했는데, 불러도 고개만 잠시 휙 돌려 쳐다볼 뿐 다리는 계속 가던 길을 간다. 배가 홀쭉한 게 잔뜩 굶주린 모양이라, 적당한 풀숲에 차를 세운 뒤 랜턴을 들고 내린다. 슬슬 접근하니 방향을 홱 돌려 되돌아가버린다. 차에서 먹을 것과 그릇(빈 햇반 용기)을 꺼내 들고 쫓아간다. 


이 개는 사료봉지나 간식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부스럭거려 본들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유인할 수가 없다. 나는 이 녀석의 후각에 기대를 걸어본다. 개가 이동하는 경로에 사료를 몇 알씩 둬서 내 손에 있는 게 먹을 거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곳곳에 떨어진 사료를 주워 먹으며 따라오다 보면 사료를 가득 담은 그릇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헨젤과 그레텔 접근법이라고 명명했다) 몇 군데는 그냥 지나치고 나서야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유달리 경계심이 강하다. 나와 조금만 거리가 가까워져도 다시 방향을 바꿔버린다. 이럴 때는 끈기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차들도, 가로등도 없는 중산간의 새카만 도로 위에서 사람 하나와 개 하나가 거리를 유지한 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간다. 


중간중간 짖는 소리를 내면서 관심을 끌기도 하고, (제가 냈습니다) 수풀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으면 간식을 주변에 던져서 경로를 유도한다. 다행히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완전히 곁을 내주지는 않는다. 개는 움푹 들어간 밭 입구에 가로막히자 살짝 당황한 눈치다. 조금씩 다가서자 몸을 낮추고 달아날 곳을 찾는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사료를 소리 내서 그릇에 담는다. (중간중간 맛있게 먹는 척도 합니다) 멀찌감치 내려두었다가 조금씩 코 앞으로 밀어 넣는다. 


코에 냄새가 닿을 만큼 그릇을 갖다두는데 성공한다. 멀리 서서 밥을 먹나 지켜보는데, 이쪽만 계속 경계하고 사료에는 다가가지 않는다. 내가 보고 있는 한 입을 대지 않을 분위기여서 자리를 비켜준다. 개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계속 걷는다. (같이 걸을 땐 몰랐는데 혼자가 되니 무서웠다) 차로 돌아가서 충분히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 개가 있던 곳으로 천천히 돌아간다. 개는 사라지고 없다. 비어 있는 그릇을 챙겨서 집으로 향했다. 




밤길 위의 인간


밤의 동물들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처럼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어두운 밤길은 그 어딘가로 닿는 과정일까? 따지고 보면 튀어나오고 사라진다는 설명은 부적합한 것 같다. 내가 이들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은 차의 헤드라이트가 직선으로 비추는 편협한 도로 위뿐이다. 개나 노루, 또는 간혹 보이는 오소리나 족제비들이 넓게 깔린 어둠 속을 활보하는 중에,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듯 순간의 단면만을 포착한 셈이다. 밤에 떠도는 것 자체가 이들의 고유한 활동인지도 모르겠다. 이 어두운 길은 어딘가로 통하거나 지나가야 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그들의 넓고 고요한 생활영역이다. 


얼른 이 길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나는 그들의 행동양식을 속속들이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길 위의 동물들에게 사람들은 긴 불빛의 궤적을 남기며 늘 어디론가 바삐 가는 존재들이다. 




귀엽지만 딱히 영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A가 실패하면 B가 바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있는 자해공갈 노루, 통행세를 징수중인 고양이들
잘 꼬드겨서 밥을 먹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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