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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덕호 Oct 21. 2024

이 꿀벌이 먹고사는 법

꿀벌

* 주의: 끝부분에 곤충 근접사진이 있습니다. (귀여움 주의)




초보 양봉인


‘꿀을 얻기 위해 벌들이 꽃잎을 뒤적거리는 사이 꽃은 퍼져나간다. 숲과 풀들을 펼치고 번성하게 만드는 의도치 않은 동작들이 있다.’라는 문장을 다시 한번 쓴다. 꿀벌은 작은 톱니바퀴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며 계절을 구동시킨다. 이 조그마한 생물의 근면함을 보고 있자면 흐뭇하다. 그 부단한 생명활동이 만들어내는 거대하고 느릿한 흐름 속에 몸을 맡기고, 세월을 무작정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작업실과 멀지 않은 곳에 지인 K가 운영하는 양봉장이 있다. K는 내가 목공방을 준비할 무렵 양봉을 시작한 청년 농업인인데, 우연찮은 기회에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 양봉을 시작할 때부터 어깨너머로 지켜보았고, 어쩌다 보니 나도 올해 2년째 양봉 주기를 경험하며 꿀을 수확하고 있다. 내년이면 3년 차니까, 이제는 양봉인들만의 비밀 사교 모임에 초대돼도 몇 마디씩 말을 섞을 정도는 될 것이다. (물론 그런 모임은 실재하지 않습니다… 아니라고요?)


꿀벌은 여러모로 신기한 생물이다. 한 마리의 여왕벌이 중심이 되는 군락에서 수만 마리의 일벌이 역할을 나눠 세대를 이어간다. 밀랍으로 완벽한 육각형 구조의 집을 짓고, 동료의 사체나 오래된 벌집 찌꺼기를 물고 나와 벌통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버리는 등 유지 관리도 열심히 한다. 더운 날에는 벌통 입구에서 교대로 날갯짓을 해서 통풍을 돕고, 추운 날에는 서로 뭉쳐 온도를 유지한다. 꿀과 꽃가루를 모아 저장고에 차곡차곡 쌓은 후 입구를 밀봉해 숙성시키기도 한다. 여왕벌이 수명을 다하면 일부 애벌레에게 로열젤리를 먹여 새로운 여왕을 길러낸다. 군락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유기체 같다.




꿀 수확


양봉이라고 하면 그저 벌들의 가여운 노동에 뻔뻔스레 빨대라도 꽂고, 말 그대로 ‘꿀을 빠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신경 쓸 일이 많았다. 우선, 꿀을 수확할 수 있는 시기가 제한적이다. 꿀을 채취할 수 있는 밀원식물이 풍부한 봄에서 초여름까지가 대목이다. 반면에 꽃들이 없는 시기에는 인간이 벌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벌들은 모아놓은 꿀을 먹으며 추운 계절을 나야 하는데, 인간이 꿀을 가져가버리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설탕을 물에 타서 벌들에게 먹인다.


설탕물도 벌들이 일단 먹고 나서 토해낸 후 저장한다. 이게 ‘사양꿀’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유통되는 제품이다. 양봉업자 K는 매우 고지식한 봉밀 순수령 전도사로서, 꿀 수확에 앞서 사양꿀을 매우 꼼꼼히 제거한다. (이 양봉장의 거의 유일한 부가 노동력인 나에게 꼼꼼히 제거하도록 시킨다, 라고 해도 무방함) 꽃이 피는 계절이 다가오면, 사양꿀을 모두 비워내고 꽃에서 얻은 꿀로만 벌통을 채울 준비를 한다.


벌꿀 약탈범 K가 벌통에서 벌집을 꺼내 카트에 실으면, 나는 그것을 채밀기가 있는 곳으로 가져간다. 채밀기는 벌집의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원심력만으로 꿀을 추출하는 기계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커다란 통돌이 세탁기처럼 생겼습니다) 뜨거운 물에 담근 칼로 밀봉된 벌집 뚜껑을 벗겨내고 채밀기를 작동하면, 통이 회전하며 꿀을 털어낸다. 사양꿀을 탈탈 털어낸 뒤 비어있는 벌집을 다시 벌통에 넣어두면, 벌들이 부지런히 꽃을 오가며 꿀을 채워 넣는다. 그러면 다시 같은 과정을 통해 천연꿀을 수확하는 것이다.


천연꿀은 벌들의 활동범위 안에 피는 꽃들의 종류에 따라 빛깔과 향이 확연히 달라진다. (벌통으로부터 직선거리 약 2km 이내라고 합니다) 부지런한 양봉인들은 다양한 꽃들의 개화 시기에 맞춰 벌통을 이동시키며, 일 년에 여러 번 다른 종류의 꿀을 수확하기도 한다. (K는 그렇게 부지런하지는 않아 보인다) 하루아침에 곳간이 털린 벌들이 낙담하지 않도록, 꿀을 딴 이후에는 설탕을 개어 벌들에게 급여한다. 이것으로 꽃이 없는 시기에 대비하고, 꽃이 피면 다시 자연에서 난 꿀을 채울 준비를 한다.




감귤꽃꿀


꿀벌 집사 K의 양봉장은 구좌읍 김녕이라는 곳에 있다. 주변에 자생하는 산벚나무도 있고, 메밀밭이나 호박밭도 가까이 있어 좋은 환경으로 보인다. 올해는 감귤꽃이 필 때 한 번 더 꿀을 수확해 보겠다고 했다. 해가 지고 벌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벌통 문을 닫고 트럭에 실어 중산간 지역의 감귤밭으로 옮긴다. 시일이 지나 충분히 꿀이 모였겠다 싶으면 다시 가서 가져오는 식이다. 가벼웠던 벌통이 돌아올 때는 꿀로 가득 차 묵직해진다. (감귤여기 해당되지 않지만, 곤충 매개 수분이 필수적인 작물들은 밭에 일부러 벌통을 갖다 두거나 수정벌을 사서 풀어놓기도 한다)


벌통을 갖다 두러 갔을 때, 하얀 감귤꽃이 만개한 밤의 과수원에는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가득했다. 이날 딴 감귤꽃꿀에서도 역시 밝고 달달한 냄새가 났다.




엘도라도


나는 벌통 하나쯤의 지분을 주장하며 채밀 후 소정의 꿀을 가져간다. (본인이 직접 꽃을 돌아다니는 고생을 안해봐서 그런지) 벌꿀 인심이 좋은 K는 매년 마땅한 몫보다 더 많은 양을 챙겨준다. 그래서 여기저기 나눠주고도 남는다. (양이 그렇게 많다기보다는 지인이 없는 편이기도 합니다) 나도 평소에 꿀을 즐겨 먹지는 않지만, 작업실에는 한 병씩 꼭 갖다 둔다. 꿀이 꼭 필요한 손님이 간혹 찾아들기 때문이다.


어느 날 작업실 책상에 앉아 도면 작업을 하던 중, 붕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들어왔다 길을 잃고 헤매는 꿀벌이었다. 어쩌다 2층까지 올라와 헤매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출구를 찾느라 상당히 힘이 빠져있는 모양이었다. 마침 꿀이 있어서 줬더니 잘 먹는다. 혀를 날름거리며 정신없이 먹는데, 할짝거리는 감각이 피부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면 배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게 눈으로도 보인다. 이내 뒤뚱거리며 열어둔 창문으로 날아갔다.


이게 공방에서 꿀벌과의 첫 근접 조우였는데, 그 뒤로 벌들이 자주 찾아온다. 같은 녀석인지는 모르겠다. 연달아 등장하기도 하는 걸로 봐서 다른 개체도 있는 것 같다. 벌들은 꽃밭의 위치를 기억하고 좌표를 공유한다고 들었다. 익히 알려진 몸동작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그 정확도가 상당하다고 했다. 맛집으로 소문이라도 나서 떼로 몰려올까, 괜한 짓을 했나 싶었다. 그래도 끽해야 한두 마리씩 들리는 정도라 부담 없이 감당하고 있다.


한창 일하는 시기에 태어난 꿀벌의 수명은 한 달이 좀 넘는 수준이고, 활동이 적은 겨울에도 최대 6개월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 일벌 한 마리가 평생 모으는 꿀의 양은 기껏해야 티스푼 하나 정도라고 한다. 일평생 일해야 얻을 수 있는 꿀을 여기서는 떠먹여 주고 있으니 부랴부랴 동료들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다.


꿀이 강처럼 흐르는 황금의 땅을 찾아냈다는 모험가의 말에 반신반의했을까? 코웃음을 치며 허풍선이 취급을 했을까? 기껏 그 말을 믿고 찾아온 동료가 허탕 치는 것은 곤란하다. 꿀벌에게 사회생활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거짓말쟁이가 되어 무리에서 배척당하는 상황은 원하지 않으므로, 오는 족족 배불리 먹여 보낸다. 어차피 겨울이 되면 자연스레 발길이 끊길 테니 그전까지는 상관없다. 매번 꿀을 털어가는 입장이지만 이러면 좀 덜 미안해도 되지 않나? 뺏었다가 그거 조금 떼 주면서 생색내기는!




갓 태어난 일벌은 일정 기간 내근직으로 근무하며 집안일에 매진한다
꽃가루나 꿀을 모으고, 집을 짓는 게 일벌이 하는 일
바꿔쓰기 캠페인 진행 중. 임도 보고 뽕도 따고 → 벌도 보고 꿀도 따고
여기까지 왔다면 밥은 먹여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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