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첫차는 1993년식 현대 그레이스였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어느 날 집 앞 골목에 서있던 군청색 봉고차의 세련된 모습을 기억한다. 러닝셔츠를 입고 세차를 하던 아빠는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안고 첫 패밀리카를 소개해줬다. 군청색의 12인승 봉고차는 정말 크고 넓었다. 교회 사람들 모두를 태울 수 있을 만큼 큰 차였다. 아빠는 녹색 시트지를 오려서 샬롬이라는 글자를 차 문에 작게 붙였다. 대각선으로 붙은 두 글자는 한글이 아니라 이름 모를 나라의 글씨처럼 멋진 곡선을 자랑했다.
그레이스는 교회사람들을 싣고 어디든 달렸다. 형과 누나들을 태우고 수련회를 갔던 기억이 난다. 노랫소리와 쉴 틈 없이 재잘거리는 이야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주일 아침에는 교인들을 태우기 위해 아빠는 분주하게 차를 몰고 다녔다. 한 번씩 나도 그 길에 함께 동행했다. 집사님들은 인사를 건네면서 봉고차에 올라타서 꼭 눈을 감고 손을 모으면서 기도를 했다. 어른들은 차에 타려면 누구나 기도를 하는 줄 알았다. 사람들을 가득 싣고 교회로 돌아오면 기분이 좋았다. 그냥 평소보다 한 명이라도 교회에 사람이 늘어나면 기뻤다. 조수석에 타고 아빠와 같이 도로를 달리다 보면 기분이 좋았다. 빗방울을 털어내는 와이퍼를 한참 동안 구경하기도 했고 괜히 한 번씩 조수석의 서랍을 열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차를 타면서 나는 아빠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3학년으로 올라가던 무렵부터 주일 아침의 봉고차 운행시간이 줄어들었다. 익숙했던 얼굴들이 하나 둘 교회를 떠나고 채 10명도 되지 않는 성도들만 남았다. 그레이스는 안양과 비산동 언저리를 돌다 왔다. 주일 예배 전에 사람들을 픽업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서 집사님 한 분과 친한 형을 기다렸지만 10분이 넘어도 나오지 않았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기다리는 쪽은 마냥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히터를 끈 봉고차 안에서 아빠와 나는 말없이 아파트 정문만 바라봤다. 텅 빈 그레이스가 왔던 길로 돌아갈 때 나는 고개를 돌렸다. 조수석 옆창문 너머의 아파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교회 문을 닫으면서 봉고차에 우리 가족과 다른 사람들이 함께 타는 일은 없었다. 성도들을 실어 나르던 그레이스는 건축자재와 비료 각종 농산물을 싣고 달렸다. 아빠의 그레이스는 23년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차체 곳곳이 삭아서 바스러지고 녹이 슬어서 도장이 벗겨진 모습을 기억한다. 샬롬이라는 시트지로 만든 스티커는 폐차하기 전까지 붙어있었다. 처음의 녹색 빛이 사라지고 누렇게 바랜 채 세월과 기억을 품고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폐차하는 날 아빠는 마지막으로 그레이스를 몰고 잠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나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곳에 그레이스의 마지막 발길이 닿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