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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Jun 22. 2023

주보

  옥상의 창고를 정리하다 오래된 타자기를 찾아냈다. 어렸을  아빠가 주보를 만들  쓰던 타자기가 분명했다. 까만 키캡을 달고 있는 타자기는 제법 무거웠다. 먼지를 털어내고 여기저기 만지다 보니 종이를 끼워 넣는 법이 기억났다.   시도해 봤지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서 뚜껑을 열었다 덮었다. 지금은 핸드폰 하나면 못하는  없는 세상이지만 1993년은 달랐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거실의 식탁에 앉아서 주보를 만드는 아빠를   있었다. 타자기가 내는 경쾌한 타자음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렸다. 길게 이어지는 기분 좋은 타격음이 그치면 아빠는 나를 불렀다.


 완성된 주보와  원짜리를 건네주고  손에는 300원을 쥐어주면서 심부름을 맡겼다. 동네 문구점에 가서 주보를 복사해 오는 간단한 임무였다. 300원으로   슈퍼에서 치토스를  봉지사서 까먹으면서 문구점을 향해 걸었다. 작은 동네라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금방 도착했다. 30 가까이 시간이 지났지만 문구점의 이름을 기억한다. 흥진문구라는 간판은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붓글씨처럼 휘어진 모양 때문에 홍진문구로 보일 때도 있었다. 흥인지 홍인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모르겠다. 커다란 복합기를 들어놓은 문구점은 아빠가 단골로 찾는 곳이었다.


 주보를 건네고 주인아저씨에게 복사를 부탁했다. 복사가 끝나는 동안 나는 문구점의 진열장을 구경했다. 후레쉬맨과 바이오맨 사진이 컬러로 인쇄되어 있는 커다란 박스에 매번 시선을 빼앗겼다. 변신로봇이었다.  때마다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린이날이나 크리스마스 때나  번도 사달라는 말을  했다. 나는 키보다 눈치가 빨리 자랐다. 손에 넣을  없는 현실을 먼저 이해했다. 그래서 장난감 박스 보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설명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로봇을 타고 노는 상상을 하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커다란 복사기는 반복적인 소리를 내며 주보를 뱉어냈다. 주보가  장씩 늘어날 때마다 복사기 본체 사이로 빛이 번쩍거렸다. 기계가 돌아가면서 나는 특유의 냄새는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산리오의 캐릭터가 그려진 필통이 놓여있는 유리장을 구경하면서 나는 문구점을 나왔다. 누런 서류봉투 안에 들어있는 두툼한 두께의 주보는 기계에서 나온  얼마 되지 않아서 따뜻했다.


 아빠는 주보에 직접 그림도 그려 넣었다. 주보의 그림은 계절에 맞게 달라졌고 아빠의 그림을 좋아했던 나는 주보를 모아서 보관했다. 주로 등장했던 멋진 교회그림은 아마도 아빠의 꿈이었을 것이다. 성공이 보장된 대형교회의 부목사 자리를 버리고 택한 개척교회는 가시밭길이나 마찬가지였다.  선택을 후회하는 대신 아빠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안타깝게도  노력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결과는  성공과 실패처럼 간단하게 표현할  있지만 현실은 한마디로 정의할  없다. 주보에 멋진 교회를 그리면서 품었던 아빠의 소망은 루지 못한 으로 남았.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도 낡은 타자기를 버리지 않았던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있을  같다. 등을 꼿꼿하게 펴고 앉아 능숙하게 타자기를 사용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이제 기억 속에만 남은  시절이 그리운 나이가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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