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천마을은 재개발로 인해 사라졌지만 대농단지와 안양월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다. 댕리단길에서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안양월드 앞을 지나게 된다. 26년 전 모습이 거의 대부분 남아있는 오래된 동네는 잊고 있었던 기억을 불러온다. 함께 놀던 동네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골목에서 달려올 것만 같다. 매일 보고 살던 풍경은 때로는 추억보다 더 선명하게 남는다. 90년대의 안양월드는 대농단지의 유일한 쇼핑센터로서 동네의 랜드마크나 마찬가지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안양월드 앞에서 자주 만났다. 대농단지는 비슷하게 생긴 다세대주택이 늘어선 동네였으므로 눈에 띄는 건물은 안양월드뿐이었다.
여름에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었고 겨울에도 히터 때문에 따뜻했다. 무엇보다도 1층에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게임샵이 있었다. 동네 남자아이들은 매일 진을 치고 앉아서 게임을 구경했다. 유리 진열장에는 슈퍼패미컴용 게임팩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최상단에는 꿈의 게임기로 불렸던 플레이스테이션용 게임 CD들이 상장처럼 걸려있었다. 화려한 아트웍으로 장식되어 있는 표지를 보면서 친구들과 나는 게임 내용을 상상하는 것을 즐겼다. 주인아저씨는 구경하는 아이들에게 게임을 하게 해 줬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마저 즐거웠다. 얼마 후 친구가 플스 1을 그 샵에서 구입하면서 VIP 대접을 받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가면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게임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같이 놀 수 있다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게임을 잘하는 사람들의 플레이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록맨이나 마리오를 하면서 게임샵에서 시간을 보내다 배가 고파지면 마트 스낵코너에서 꼭 핫도그를 사 먹었다. 당시 인기 있던 만화 이야기를 하며 서로 한 입씩 나눠 먹었던 핫도그는 정말 맛있었다. 용돈을 받는 날이 되면 친구들과 옥상의 방방을 타러 갔다. 트램펄린 위에서 힘껏 뛰어오르면 안양 시내가 전부 다 보였다. 다세대주택과 빌라는 손톱만큼 작아 보였고 여기저기 널려있는 아파트 공사현장도 눈에 들어왔다. 친구들과 누가 더 높이 뛰는지 시합하면서 방방을 타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놀다 지치면 나란히 의자에 앉아 쉬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자판기에 콜라를 뽑아서 나눠 마셨다. 하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안양월드는 친구들과 나의 쾌적한 놀이터였다.
여전히 안양에 살고 있는 나는 대농단지를 지나갈 일이 생기면 안양월드를 한 번씩 방문한다. 어린 시절 자주 가던 가게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외벽 여기저기 녹이 슬었고 진입로의 바닥재는 군데군데 깨져있었다. 종종 친구들을 기다리며 앉아있던 벤치는 담뱃재로 얼룩이 생겨 앉을 수 없었다. 푸른 하늘빛의 건물 외벽은 변색되어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낡아 보였다. 그러나 안양월드는 여전히 대농단지를 지키고 있다. 오래된 거인처럼 세월의 풍화를 견뎌낸 모습은 애처로운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친구들과 나는 모두 대농단지에서 떠나게 되었다. 매일 보던 얼굴들이 바뀌면서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천천히 멀어졌다. 둥지를 떠난 아이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추억을 함께 만들었던 동네는 여전히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