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고 이틀간 시원하게 비가 쏟아졌다. 뇌우를 동반한 요란한 장대비가 아침저녁으로 내렸다. 공원 가로등 불빛 아래 빗줄기가 만든 투명한 실선이 가득했다. 어린 시절에는 은하수가 넘쳐서 비가 되어 내린다는 상상을 했다. 가끔씩 기억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세차게 때리는 채찍질 같은 빗소리에 오래된 기억이 도망치듯 풀려나왔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장마를 싫어했다. 우산을 들고 버스로 통학하는 것도 맘에 안 들었지만 정말 싫었던 것은 장마로 인해 발생하는 침수였다.
아빠가 운영했던 지하의 개척교회는 장마철만 되면 사방에서 빗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큰 비가 내리면 흙탕물이 밀려들어왔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합심해서 물을 퍼냈다. 하늘이 폭우를 퍼붓는 날에는 늘 긴장해야 했다. 교회가 물에 잠기지 않기를 기도하다 잠든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예외는 없었다. 매년 교회는 침수피해를 입었고 우리 가족은 장마철마다 매번 고생해야 했다. 발목까지 물이 차면 양호한 편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종아리까지 물에 잠긴 적도 있었다. 한참 동안 양수기 모터를 돌려서 수위가 낮아지면 그때부터는 쓰레받기를 들고 고무대야에 물을 쓸어 담았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해야 했다. 중노동이 마무리되면 아빠는 더러워진 바닥에 대걸레 질을 했고 엄마는 물에 젖은 집기들을 일일이 닦아냈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 교회는 볕도 바람도 들지 않아서 선풍기를 돌려가며 물기를 말렸다. 빗물에 절여진 교회의 나무의자들은 마르면서 모양이 틀어졌다. 아빠는 망치와 못을 들고 한동안 의자를 고쳐야 했다. 장마철이 끝날 때가 되면 습기를 먹고 자란 곰팡이들이 교회 여기저기에 진을 쳤다. 커튼 위로 새까맣게 달라붙은 곰팡이는 우리 가족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았다. 가을과 겨울이 와도 곰팡이는 지하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비가 내리고 나면 지상에는 꽃이 피지만 햇빛 없는 지하에는 곰팡이가 핀다. 검게 피어난 곰팡이는 장마가 남기고 간 기분 나쁜 농담 같았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6월이 오면 나는 주일마다 올해는 장마가 빨리 지나가길 기도했다. 그러나 교회가 문을 닫았던 마지막 해까지 장마는 우리 가족을 끝까지 괴롭혔다. 그리고 매년 반복하는 고생을 조롱하는 곰팡이를 남기고 갔다.
기억은 갑자기 깨어나 지난 시절의 냄새와 질감을 생생하게 불러온다. 창문 너머 풀숲에서 익숙한 물비린내와 흙냄새를 맡았다. 오래된 시절은 시간의 흐름에도 씻겨 내려가지 않고 남아있다. 일주일치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당분간 햇빛을 볼일은 없을 것 같다. 늦게 시작된 장마는 사람들을 올해도 오래 괴롭힐 것이다. 덕천마을을 벗어나면서 장마철 물난리는 더 이상 없었다. 이사 온 집은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샐 때도 있었지만 물에 잠기는 일은 없었다. 세찬 폭우가 쏟아지는 날 우리 가족이 매년 반복했던 고생은 기억으로 남았다. 글을 쓰면서 그 시절을 돌아보지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추억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미화되지 않는 기억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