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창고에는 성미함이 있었다. 파란 플라스틱으로 만든 커다란 쌀통. 한 달에 한 번씩 집사님과 교회의 형누나들은 비닐봉지에 쌀을 담아왔다. 그리고 파란 성미함의 뚜껑을 열고 집에서 챙겨 온 쌀을 쏟아부었다. 어린아이였던 내가 들어갈 만큼 큰 쌀통이 가득 차는 모습을 구경했다. 엄마아빠는 그 쌀을 교회를 찾아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교회 사람들과 밥을 지어먹기도 했고 특별한 날에는 방앗간에 들고 가서 백설기를 만들어 돌렸다.
언젠가부터 매주 보던 형과 누나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다. 외동이었던 나를 친동생처럼 예뻐해 줬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이유를 차마 부모님에게 물어볼 수 없었던 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성미함 가득 쌀을 채워 넣었던 집사님들도 발길을 끊었다. 시간이 지나자 우리 가족과 집사님 두 분만 교회를 지켰다. 텅 빈 나무의자가 늘어선 주일 낮의 풍경은 늘 지루했다. 혼자 나가서 동네를 돌아다니다 예배가 끝날 때쯤 교회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두 명뿐인 성도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창고에 들어가 성미함을 몰래 열어봤다.
하얀 페인트로 칠한 나무문을 열고 벽에 달린 스위치를 올리면 노란 백열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하얀빛이 밀어낸 그림자 사이로 벌레들의 요란한 발소리가 들렸다. 창고 가운데 놓인 성미함의 뚜껑을 열면 바닥이 보였다. 쌀을 퍼내기 위해 놔둔 스테인리스로 밥그릇 안에 얼마 남지 않은 쌀이 담겨있었다. 노란빛으로 물든 쌀은 습기와 냄새를 품고 있었다. 집게손가락으로 쌀알 몇 개를 집어보면 까만 점 하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쌀알보다 작은 쌀벌레를 잡아 손바닥 위에 올려 한참 구경하다가 놔줬다. 성미함은 열어볼 때마다 그대로였다. 쌀은 더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까만 쌀벌레만 성미함 속에서 행복한 만찬을 즐겼다.
수요예배도 금요일 철야예배도 우리 가족 셋 뿐이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꽃을 뿜어내는 난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봄이 올 때까지 예배를 드렸지만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성미함 속의 까만 쌀벌레들은 열어볼 때마다 늘어났지만 사람수는 늘지 않았다. 똑같은 풍경 속에 박제된 것처럼 우리는 자리를 지켰다. 내가 마지막으로 성미함의 뚜껑을 열어봤을 때 익숙한 모습의 쌀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날개를 달고 성충이 되어 순식간에 내 주변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나는 그 후로 성미함을 두 번 다시 열지 않았다. 교회에서 함께 나눠 먹었던 밥도 서로에게 건네던 새하얀 백설기도 성미함과 함께 그렇게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