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골목 사이에 수많은 연립주택이 늘어서있는 덕천마을의 풍경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덕천마을은 높은 건물이 없었다. 지금은 메가트리아가 들어서면서 쭉 뻗은 스카이라인을 자랑하지만 90년대의 모습은 그저 오래된 동네였다. 안양천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애향공원이 있었다. 비둘기 먹이를 주는 아이들과 게이트볼을 즐기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나와 동네 친구들의 놀이터였던 공원 옆에 우리 교회도 있었다. 작은 아파트에 딸린 상가에서 아빠는 교회를 운영했다. 지하에 교회가 있었고 1층의 가게는 세탁소와 슈퍼뿐이었다. 그리고 2층에 우리 가족이 사는 사택이 있었다.
원래 있던 재봉공장이 폐업해서 우리 가족이 들어가서 살았다. 상가는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더웠고 겨울에는 말도 못 할 만큼 추웠다. 창문도 아파트 벽면 쪽으로 나있어서 햇볕도 거의 들지 않았다. 공장으로 쓰던 곳이라 보일러실도 따로 없었고 방도 없었다. 커다란 합판과 샌드위치 판넬을 가져와서 아빠가 직접 벽을 세웠다. 책장을 일렬로 세워서 전기배선과 보일러가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게 창고이자 보일러실이었다. 사택은 바퀴벌레가 가득했다. 각고의 노력으로도 벌레를 몰아낼 수 없었던 우리는 그냥 살았다. 벌레가 천장과 합판으로 만든 벽 속을 긁어대는 소리를 매일같이 들었다. 집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그곳에서 4년을 살았다. 살다 보면 추억이 되지 않는 기억도 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은 미화되지 않는다.
화세식 변기가 있는 화장실을 2002년까지 썼다. 바가지로 물을 떠서 직접 변기에 넣어야 했다. 상가 2층에 사는 동안 나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나는 집이 싫었다. 커다란 창고나 다름없는 곳에 친구들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가정환경조사 설문지를 작성할 때 부모님 직업란에 목사님과 사모님이라고 적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에 우리 교회는 사라졌다.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언젠가 좋아질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집을 볼 때마다 정말 나아질까 싶은 불안과 회의감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싫어서 집을 싫어했던 것 같다.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나를 목사의 아들로 알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마음은 불편했다. 그렇다고 아빠를 실패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싫었다. 결국 나는 거짓말을 선택했다. 그 시절 내가 싫어할 수 있는 것은 집뿐이었다. 마음이 갑갑할 때마다 옥상에 올라갔다. 십자가를 달고 있는 녹색의 철탑은 녹이 슬어서 꼭대기만 붉게 보였다. 그나마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친구들마저 없었다면 그 집에서 보낸 4년은 나에게 어떤 시절이 되었을까. 학교 끝나고 돌아오면 언제나 혼자였다. 뜨는 해도 지는 해도 볼 수 없었던 집. 그 집에서 내가 어떤 꿈을 꾸면서 살았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