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잔다. 나이가 들어도 도저히 카페인에 적응할 수가 없다. 그나마 디카페인을 마시면 좀 낫지만 깊은 수면은 포기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커피를 좋아하지만 매일 마시지는 않는다. 카페를 가도 커피를 주문하려면 나름의 결심이 필요하다. 녹차와 홍차는 여러 잔 먹어도 수면에 큰 지장이 없지만 커피는 한 잔만 마셔도 새벽 3,4까지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차에도 카페인이 들어있지만 꼭 커피만 잠을 설치게 만든다. 하지만 각성효과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 같지는 않다. 밤에만 잠들지 못할 뿐 커피를 마셔도 낮이나 초저녁에는 얼마든지 잘 수 있다.
애초에 정신이 번쩍 드는 카페인의 각성효과를 느껴본 적이 없다. 대학교 다닐 때나 회사원 시절이나 아침에 커피를 마신 적이 거의 없다. 마셔도 머리가 잘 돌아간다거나 잠이 확 달아나는 경험을 해본 적도 없다. 그런 점에서 카페인은 나에게 아무 쓸모없는 물질이다. 살면서 카페인의 효과를 본 적도 없다. 밤늦게까지 깨어있어야 할 때는 그냥 홍차를 두어 잔 마시면 된다. 앞으로도 카페인의 덕을 볼일은 없을 것 같다. 커피의 향과 풍미를 정말 좋아하지만 카페인은 싫다.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면 그만이지만 미묘하게 맛과 향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잠을 못 자더라도 진한 커피를 포기할 수가 없다.
커피의 매력은 향에 달려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로스팅한 원두의 다채로운 향이야말로 커피의 본질이다. 디카페인 커피도 나쁘지는 않지만 풍부한 특유의 향을 제대로 살릴 수는 없다. 커피는 생산 지역에 따라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기후와 품종 그리고 재배방식에 따라서 맛이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커피와 와인은 비슷한 면이 많다. 기후가 맛에 영향을 주고 향을 즐기기 위해 마신다. 단독으로도 즐길 수 있지만 곁들이면 더 즐거운 음식도 많다. 그리고 까다로운 애호가들이 세계 각지에 널려있다는 점도 닮았다. 과거에는 기호식품이었지만 이제는 생활필수품의 지위를 얻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어디를 가도 커피나 와인이 없는 집이 없다. 누구나 와인과 커피 둘 중 하나는 즐겨 마신다.
장점 때문에 단점을 안고 가는 경우가 있다. 커피의 풍미를 포기할 수 없어서 나는 카페인이 주는 괴로움을 감수한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몸은 적응하지 못하지만 미각이라는 본능은 늘 이성을 이긴다. 잠 못 드는 긴 밤 내내 괴로울걸 알면서도 입술에 커피잔을 댄다. 다음날 오전 내내 졸음에 시달리겠지만 지금은 커피 향에 취한다. 술이나 커피나 담배나 사람을 중독시키는 것들 하나 같이 다 이런 식이다. 본능이 언제나 이성을 무너뜨린다. 찰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는 본능적인 행동. 기껏 일주일에 두 세잔 마시는 커피지만 커피는 내 삶에서 가장 자극적인 본능과 이어져있다. 오후에 마신 커피 때문에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또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커피를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