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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Nov 01. 2023

옷 입기를 사랑하는 남자

 나는 오랫동안 클래식 스타일을 사랑했다. 멋진 슈트를 빼입은 빈틈없는 모습의 남자는 나의 로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슈트에 대한 동경을 품고 살았다.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단정한 양복을 입고 깔끔한 가죽구두를 신은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아들은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자라는 작은 묘목이다. 슈트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내 머릿속에 멋진 남자의 상징으로 남았다. 어린 시절의 인상적인 기억은 삶을 관통하는 취향이 된다. 재킷과 만년필 그리고 가죽으로 만든 묵직한 슈트케이스까지. 그 당시 내 시선을 사로잡은 아이템들은 손에 넣을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언젠가를 기약하면서 나는 로망을 품고 살았다. 인생은 꿈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로망이다.


 좋아하는 것을 동경하다 보면 결국 손에 넣고 싶어 진다. 패션의 본질은 이미지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꿈꾸던 이미지를 하나씩 사들였다. 다만 로망과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은 생각이상으로 험난했다. 머리로 아는 지식과 상식을 가지고 옷을 사면 꼭 실패를 맛보게 된다. 옷을 좋아하는 자칭 옷환자들은 이를 수업료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한다. 패션잡지에서 읽은 내용은 현실과 동떨어져있었다. 직접 브랜드를 찾아서 옷을 입어보고 물건을 써봐야만 진가를 알 수 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심미안은 경험의 산물이다. 한 번에 원하는 목적지로 이어져있는 지름길은 없었다. 일이라면 길고 지루했겠지만 취미생활은 질릴 틈이 없었다. 시간과 돈을 써가며 길고 지루한 시행착오를 벌이는 일조차 즐거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옷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 다양하게 얻은 정보를 현실에 적용하다 보니 경험지식이 쌓였다. 원단을 구별할 줄 알게 되고 패션아이템의 품질을 판단하는 요령이 생겼다. 좋은 옷의 고르는 기준과 잘 만든 양품을 찾는 비법을 획득하자 실패는 사라졌다. 싸고 좋은 물건은 없다.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방법만 존재할 뿐이다. 비싸고 좋은 옷을 저렴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경로가 하나 둘 늘어났다. 3차 아웃렛을 다니기 시작했고,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중고거래를 통해 흥정하는 법도 익혔다. 옷을 저렴하게 사게 되면서부터 즐거운 옷 입기가 시작됐다. 더는 유니클로 감사제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아웃렛 파이널 세일기간이 되면 10만 원으로 8,90만 원대 코트나 슈트를 살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내가 동경했던 클래식 스타일의 슈트를 마음껏 입었다. 깨끗하게 입은 옷은 복식카페를 통해 중고로 판매했다. 옷은 돌고 돌았다. 정말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들 비슷했다. 다채로운 스타일을 경험하고 취향을 찾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옷을 사고팔았다. 옷을 소유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입는 즐거움도 있다. 나는 소장하는 것보다 가능하면 많은 옷을 입어보는데 열을 올렸다. 가방이나 신발도 사고팔았다. 수많은 옷이 옷장을 들락날락했지만 내 지갑에서 나가는 돈은 거의 없었다. 옷을 판 돈으로 다시 새로운 옷을 샀기 때문이다. 반복작업의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정말 맘에 꼭 드는 아이템만 내 옷장에 남았다.


 옷 입기는 언제나 즐거웠다. 슈트를 고를 때의 설렘, 셔츠와 재킷 그리고 타이를 조합하는 재미, 좋은 구두를 갖췄을 때의 뿌듯함까지. 남자의 옷 입기는 레고와 비슷하다. 형형색색의 블록을 맞춰가며 모형을 완성하는 것과 비슷한 성취감을 준다. 그래서 몰입할수록 즐거웠던 것 같다. 이제는 예전처럼 슈트를 입을 일이 별로 없다. 즐거운 취미생활에도 휴식이 필요하다. 지금은 편안한 옷을 더 선호한다. 여전히 나는 패션을 좋아하고 옷을 사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취향은 달라진다. 소장하는 것보다 입는 것이 좋았던 시기를 지나자 옷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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