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민 Nov 21. 2023

살아남는 것이 승리다

트라우마와 싸우다

 누구나 고통을 겪다 보면 언젠가 한계에 직면한다. 악으로 버티고 깡으로 버틴다 해도 한계를 피할 수는 없다. 괜찮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괜찮을 리가 없다. 그러다 내면의 안전핀이 뽑히고 나면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힘든 순간을 이겨내고 일상을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면에 입은 충격은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는 모습과 정반대로 속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여러 면에서 전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되더라도 이런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 이 상처를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정신적인 외상인 트라우마는 단어 그대로 내면에 입은 상처다. 시각화할 수는 없지만 지속적인 고통을 유발하므로 물리적 피해를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만신창이가 된 마음과 정신은 자주 덧나거나 한 번씩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스스로는 안다. 인간은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환부를 보면서 침묵 속에서 조용히 절망감을 느낀다. 다 괜찮아진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전부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는데 착각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환경이 달라져도 과거는 그대로 남아있다. 기억은 선택해서 지울 수 없다. 고통스러운 과거는 선명하게 남아 나의 현재를 조롱한다. 찰나와 같은 끔찍한 순간의 기억은 여러 번 지워도 또다시 반복재생된다.


 사람의 마음에는 근육이 없다. 신체를 아무리 단련해도 정신력을 향상할 수는 없다. 산사태처럼 무너져내리는 슬픔과 고통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리카미 하루키가 쓴 <언더그라운드>에는 트라우마 관한 짧은 일화가 나온다. 젊은 시절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노인이 신경정신과를 찾아왔다. 그는 걸프전을 보도한 뉴스를 보고 수십 년 전의 전쟁 트라우마가 떠올랐던 것이다. 상처를 잊고 살았던 것일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의사는 하루키에게 노인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내면의 상처는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트라우마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 과거가 현재의 발목을 부러뜨리는 비극 앞에서 인간은 무력감을 느낀다. 시간은 약이 아니다. 트라우마는 시간이 지나도 처음과 똑같은 타는 듯한 고통을 품고 있다. 크기와 경중은 달라도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갖고 살아간다. 털고 일어나는 작은 생채기도 있지만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중대한 기로에 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내면에 회복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자의든 타의든 끝나기 전까지 삶은 계속해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낸다. 작고 초라하더라도 불꽃은 빛을 낸다.


 상처 입은 짐승 한 마리가 우리를 뚫고 나와 내면을 엉망으로 만들었지만 하루키 책 속의 노인은 죽지 않았다. 과거가 만든 고통 속에 저항하면서 매일 생존일 수를 늘려간다. 치열한 사투를 벌이지만 쉽게 무릎 꿇지 않는다. 아픔이 클수록 그 아픔을 품고 사는 인간 내면의 내구성도 강해진다. 한계에 직면하면 결국 무너져 내리지만 거기서 삶을 끝내지 않는 한 다시 내일이 시작된다.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삶의 의지는 또 한 번 더 기회를 만들어낸다.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는 말은 그만큼 고통에 익숙해진다는 의미다. 아픔의 크기만큼 내면의 깊이도 깊어진다. 강한 사람은 고통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 고통을 품고 살아남은 사람이다. 끝까지 살아가는 사람이다.


 한계까지 몰렸다는 말은 한계까지 버텨냈다는 의미다. 극복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는 말은 포기하지 않고 견뎌냈다는 증거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약자가 아니다. 패배자도 아니다. 매일매일 싸우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용기를 보여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로 인해 패배하지도 않았다. 극복하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살아남았다는 것이 승리다. 이제까지 그랬듯이 트라우마는 우리를 괴롭힐 수 있지만 함락시킬 수는 없다. 인간은 한 때 망가질 수도 있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패배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버텨냈다면 새로운 길도 찾아낼 수 있고 몰랐던 길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생존한 쪽이 언제나 승자다. 끝까지 살아간다면 결국 내가 이긴다.

이전 04화 기다림은 마음의 언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