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 있어서 당연한 것은 없다
나이가 들면서 확실하게 깨달은 점이 한 가지 있다.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한다. 한결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와 상황이 변하면 정답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관점이 변화하고 기술이 진보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발견이 이어진다. 사람의 가치관이나 주관도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진다. 계절이 변하듯 때가 되면 다 변한다. 태도나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은 착각이나 오만에 가깝다. 심리적인 거리가 가까운 관계일수록 확신과 착각을 혼동할 가능성이 높다. 친한 사이니까 오래 본 사이니까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 오래된 친구들과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쉽다. 상대방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관계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함께한 시간과 가까운 정서적인 거리는 친밀감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러나 사람 속은 자신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다. 혼자만의 고민과 상처 그리고 비밀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너무 가까운 사이라 말하지 못하는 내용이 적지 않다. 오래된 인간관계일수록 다툼 없이 그냥 넘어갈 때가 많다. 서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이가 좋아서 전부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도 굳이 문제 삼지 않을 뿐이다. 친분이 두터운 관계라서 당연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인간관계에 당연한 것은 없다.
호의와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는 안일함을 낳는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친밀하고 오래된 사이일수록 아주 사소한 문제로 틀어지기 쉽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해묵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이다. 방아쇠를 당기는 쪽은 잘못을 모른다. 문제를 모르는 상태라 원인은 짐작할 수 조차 없다. 한쪽은 생각 없이 편하게 행동했겠지만 다른 한쪽은 오랫동안 참고 있었던 것이다. 인내는 언젠가 바닥나기 마련이다. 무너진 댐은 고칠 수 없다. 인간관계에 크게 난 구멍은 사과나 반성정도로는 메울 수 없다. 상한 마음에 잘 듣는 약은 없다. 시간은 약이 아니다.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모두 다 안다고 생각하면 최소한의 긴장마저 사라지고 그러다 보면 선을 넘게 된다. 본인은 괜찮다고 넘어가겠지만 상대방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잘 아는 사이라 괜찮다고 멋대로 생각하는 태도는 교만이나 다름없다. 교만에서 비롯되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은 화를 부른다.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해 줄 수는 없다. 피를 나눈 가족이라고 해도 인내심은 한계가 있다. 멋대로 굴어도 되는 당연한 인간관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배려와 존중이 중요하다. 한 번 크게 틀어지거나 사이가 멀어지면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중하는 자세의 기본은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버리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대응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반응과 행동을 보고 상황에 맞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내게 익숙한 기준만 가지고 속단하고 판단하면 오해가 생긴다. 모르면 물어보거나 넘어가야 한다. 맘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평가해 버리는 오만은 대인관계를 망치는 원흉이다. 친밀하고 오래된 사이일수록 서로 모르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한 집에 사는 가족 사이에도 비밀이 존재한다. 살을 맞대고 지내는 부부 관계에도 선이 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혈육 간에도 서로 잘 모르는 이면이 존재한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생각은 교만과 오만이 만드는 착각일 뿐이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모르고 넘어가면 늘 착각이나 오해 같은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대화가 필요하다. 진지한 태도로 부담줄 필요는 없다. 하고 싶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면 된다. 마음의 문은 유려한 달변이 아니라 경청하는 태도로 열 수 있다. 사소한 이야기라도 놓치지 말고 듣다 보면 몰랐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터놓고 말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냥 넘어가라. 혼자 생각해서 곡해하고 오해하는 것보다 모르는 척 넘어가는 편이 낫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면 대화를 통해서 의문을 해소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을 버리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