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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Dec 14. 2023

이유 없는 악의

살다 보면 한 번쯤 악마를 만난다

 순수한 인간은 둘 중 하나다. 순수하게 선하거나 순수하게 악하거나.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이유 없는 선의와 함께 이유 없는 악의도 존재한다. 대가 없이 선을 실천하는 이들은 선행을 통해 성취감과 만족감을 얻는다. 그리고 이유 없이 악행을 일삼는 이들 역시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선행은 수혜자를 낳지만 악행은 피해자를 만든다. 악행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자나 흉악범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유 없는 악의를 일삼는 인간들은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서 평범하게 살아간다. 커다란 범죄를 통해 이익을 얻기보다 작은 악행을 반복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악행은 금전적인 이익이나 사회적인 편익과는 다른 종류의 성취감을 안겨 준다. 순수한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은 왜곡된 사고체계를 갖고 있다. 손익을 따지면서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저 즐거움을 위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괴롭히고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는다. 어린아이가 재미를 위해서 잠자리의 날개를 찢고 개미의 대가리를 잡아떼는 것과 비슷하다. 어린 시절의 잔혹한 일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다. 그러나 순수한 악의를 품은 인간은 유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괴롭힘의 대상이 곤충에서 사람으로 달라질 뿐이다. 그들은 번데기를 찢고 하늘로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차갑고 어두운 땅 속에 만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고 싶어 한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정말 역설적이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악의는 순수하다. 악행이 목적이 오로지 유희에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위해 그들은 노련한 연기자가 된다.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고 다채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사냥감을 발견하면 상대가 품고 있는 결핍과 상처를 파악하고 마음을 얻기 위해 가면을 꺼내 쓴다. 언제나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고 항상 배려하고 존중한다. 오래된 친구나 소중한 가족처럼 행동하면서 마음을 얻는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면 사냥감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조종하면서 가지고 논다. 자기 뜻대로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순수한 악의는 더 수월하게 악행을 저지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인간의 유형에 따라 나타나는 반응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사람의 심리를 공부한다.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활동을 지속하면서 매력적인 이미지도 구축한다. 이유 없는 악의를 가진 인간에게 사람을 괴롭히는 일은 취미생활이다. 즐거운 취미 생활을 위해서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재미는 인간에게 가장 강한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몰입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순수한 악은 순수한 선만큼 열정적이고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말의 양심도 없고 악행이 발각되더라도 뉘우치지 않는다. 재미있는 장난을 치다 운나쁘게 걸렸다고 생각할 뿐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한 번쯤 순수한 악의를 지닌 인간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사용하는 가장 흔한 수법은 이간질이다. 친구와 연인 그리고 가족과 직장동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관계를 뒤에서 조종하면서 망가뜨린다. 상처 입은 인간을 연기하면서 동정심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기도 한다. 악행을 즐기는 이들은 인간 내면의 욕망과 결핍을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결핍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심리적으로 지배하고 뒤틀린 욕망을 틀어쥐고 이용한다. 정말 삶이 힘들 때 혹은 한창 일이 잘 풀릴 때 악의를 가진 인간이 접근한다. 바닥이나 고점에서 사람을 흔드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행운이 계속되면 자만하기 쉽다. 넘어뜨리기 가장 좋을 때다.


 한결같은 호의가 일방적으로 지속된다면 의심해봐야 한다. 심리적인 거리와 선의는 비례해야 한다. 이유 없이 편의를 봐주는 행동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선행을 가장하고 있는 만큼 행동이 늘 일방적이다. 친절과 배려에 인간적인 온도가 없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매뉴얼처럼 똑같이 반응한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과 거래하거나 협상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적인 덫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선의와 호의로 가장한 제안은 간단한 조건을 달고 있다. 협상을 받아들이는 순간 족쇄가 채워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식으로든 협상하지 않고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만이 악의의 마수를 피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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