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근원이 된 확률형 BM
PC에서 모바일로 전환하면서 확률형 BM을 적용한 게임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게임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과금모델에 확률을 적용했다. 스킨과 아이템 심지어 스텟까지 과금을 통해 손에 넣을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페이투윈(pay to win) 방식이 어느 순간부터 게임 플레이의 상식이 되면서 결제가 게임의 방향성을 결정해 버렸다. 똑같은 장르의 비슷한 게임들이 데칼코마니처럼 쏟아져 나왔다. 한국형 모바일 게임의 자가복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다양성을 상실하고 장르가 가진 정체성과 독특한 개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제대로 플레이를 하려면 과금을 해야 하는 확률형 게임으로 가득한 획일화된 시장이 형성됐다.
확률형 BM을 적용한 한국형 MMO RPG 장르에서 과금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과금과 무과금유저의 게임접근방식이 달라졌고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의 차이가 뚜렷해졌다. 플레이 스타일이 다변화되지 않는다는 말은 게임의 수명이 짧다는 말이다. 과금 유저는 강한 스탯과 희귀한 아이템을 얻기 위해 결제를 반복한다. 게임 내 콘텐츠가 철저하게 과금유저를 중심으로 설계되다 보니 무과금유저의 즐길거리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신규유저와 무과금 라이트유저는 오픈초반에만 잠시 머물다 시간이 지나면 떠나버린다. 비슷한 장르의 게임이 넘치다 보니 과금유저도 게임 간 이동이 잦은 편이다. 남는 것은 많은 돈을 쓰고 기회비용 때문에 게임을 접을 수 없는 헤비유저들 뿐이다.
외부유입이 사라지고 이너서클 문화가 강해지면 게임은 완전히 닫힌 사회가 된다. 지속적인 매출이 나온다면 회사는 서비스를 유지한다. 그러나 매출이 점차 하락하면 결국 접어버린다. 출시되는 게임은 많지만 살아남는 게임은 극소수다. 확률형 BM을 적용한 모바일 게임은 장기적인 서비스 운영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기업은 수익성이 줄어들면 서비스를 종료하고 다시 같은 장르의 게임을 새로 출시한다. 흥행하면 유지하고 실패하면 대체하면 그만이다. 지속적인 관리운영의 필요성이 적은 만큼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기 쉽다. 국내 게임사들은 직업윤리의식이나 완성도를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BM에만 공을 들일뿐이다.
장르의 유사성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이제는 민망할 지경이다. 게임사의 규모에 따라 자금력과 개발능력의 차이가 분명하지만 출시하는 게임은 하나같이 똑같다. 게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세계관이나 아트웍은 템플릿을 돌려쓰는 수준이고 획일화된 스토리는 특색이 없다. 플레이 방식이나 퀘스트 인게임 내 콘텐츠와 캐릭터 육성방식도 거의 차이점이 없다. MMO RPG 장르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브컬처 게임이나 수집형 RPG 역시 복사 붙여 넣기 수준이다. 확률형 BM을 적용한 게임시스템이 진보할수록 유저들이 게임성이라고 부르는 완성도는 퇴보한다.
사업성만 신경 쓰다 보면 작품성은 망가질 수밖에 없다. 편식이 건강을 망치는 원흉이 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치우친 사업방향성은 기업의 강점을 망가뜨린다. 확률형 BM에 기댄 제작운영방식은 장기적으로 개발능력과 같은 핵심역량을 손상시킨다. MMO 명가였던 엔씨소프트는 2010년대 초반에 보여준 뛰어난 게임 제작능력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최근 3년간 출시한 리니지라이크 장르의 신작들은 모두 참패했다. 여전히 연 매출 1조를 달성하고 있지만 혁신을 보여주지 못한 점을 볼 때 미래가 어두운 상황이다. 이는 엔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뿐 대부분의 한국게임사들 모두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확률형 BM을 적용한 게임은 다른 유저보다 더 높은 스펙과 스탯을 갖는 경쟁을 핵심콘텐츠로 삼는다. 세력 간 전쟁을 치열하게 벌이는 리니지라이크나 캐릭터의 스펙을 강화하는데 주력하는 메이플류나 본질은 경쟁이다. 그러다 보니 서사와 개연성을 가지고 게임의 정체성을 풀어내야 할 콘텐츠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에서 콘텐츠는 경쟁이라는 BM을 보조하는 장치일 뿐이다. 분기 별 신규 콘텐츠 업데이트는 더 비싼 아이템과 스탯을 팔기 위해 만든 광고에 지나지 않는다. 카지노나 다름없는 확률형 아이템 뽑기에 중독된 유저들은 남겠지만 대다수의 유저들은 등을 돌리고 있다.
작년 초 스팀에 출시된 <뱀파이어서바이버>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과금모델 없는 단순한 육성 구조가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올해 초부터 전 세계적인 누리고 있는 <팰월드>도 비슷하다. 수집과 육성 그리고 대결이라는 간단한 콘텐츠만 가지고 큰 성공을 거뒀다. 게임의 본질은 즐거움이다. 콘텐츠는 유저에게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본래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확률형 BM을 장착한 한국식 모바일 게임은 갈등과 경쟁을 추구한다. 장기적으로 피로감이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백억의 제작비와 화려한 그래픽으로 무장해도 단순한 즐거움을 내세운 게임을 이길 수 없다. 게임의 본질은 재미다. 재미없는 게임은 도태될 뿐이다. 내용물이 없는 껍데기는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그저 쭉정이에 불과하다.
한 가지 장르의 게임만 즐기는 유저보다 여러 장르를 즐기는 유저가 훨씬 더 많다. 인간의 욕구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일본과 미국의 게임회사들은 다채로운 라인업을 갖추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다. 캐시카우가 되는 타이틀을 주기적으로 보완해서 출시하고 과금모델을 넣은 모바일 게임도 운영한다. 동시에 몇 년 주기로 트리플 A급 콘솔이나 패키지 게임을 론칭해서 게이머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킨다. 콘솔과 패키지 게임은 스토리가 주는 서사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한 장르가 큰 성공을 거뒀다고 해서 수익성과 사업성을 올인하지 않는다.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은 즐거움이다. 게임회사는 즐거움을 팔아서 돈을 번다. 비즈니스 논리가 게임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해외글로벌 게임사들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장르를 발굴하고 게임 라인업의 다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새로운 IP를 개발하기 위해 중소개발사들에 투자하고 서드파티 스튜디오와 동맹을 결성한다. 매출규모와 시가총액면에서 본다면 한국 게임사들은 이런 시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에 가깝다. 막대한 자금력과 뛰어난 개발인력을 가지고 확률형 BM에 의존한 장르만 내놓는 것은 변화와 개선의 의지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국내 게임업계는 아타리쇼크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멸망하는 국가는 외세에 침략을 받기 전에 내부에서 먼저 무너진다. 성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자는 변화의 흐름을 타고 오는 자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다.
물론 국내 게임사들 중에서도 새로운 IP를 확보하고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려는 시도를 한 사례는 있다. 넥슨은 거의 10년 가까이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민트로켓의 <데이브더다이버>를 성공적으로 발굴했다. 네오위즈는 불모지였던 콘솔 장르에 도전하면서 <P의 거짓>을 선보였다. 크래프톤은 여러 해외스튜디오를 인수하는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유저들의 다채로운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라인업을 갖추려면 갈길이 멀다. 문제를 개선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감이 있다. 대다수의 게임사들은 매출하락에 직면했고 영업이익 역시 급감했다. 마케팅 같은 일회성 비용이라고 변명해 봐야 소용없다. 한국 게임업계는 명백히 쇠락기에 접어들었다.
반복적으로 발생했던 게임계내부의 크고 작은 문제는 재앙이 터지기 직전의 전조나 다름없다. 리니지라이크가 몰고 온 장르완성도 저하, 확률형 아이템 문제와 같은 도덕적 해이, 안일한 운영이 빚어낸 유저와 회사 간 법적갈등, 내수에 치중한 매출과 차이나리스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수익구조까지. 앞으로 발생할 한국형 아타리 쇼크에서 자유로운 게임사는 단 한 곳도 없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이나 한국의 저조한 경제상황은 진짜 원인이 아니다. 위기는 늘 내부에서 비롯된다. 원인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게임계가 자정작용을 내놓는 것만이 해법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도 업계 전체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이고 개선을 시작했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한국도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