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블라인드 밖은 여전히 까만 밤이다. 누워서 책을 읽다 잠들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시끄럽고 요란한 꿈을 꾼 것 같았다. 머리맡에 놓인 손원평의 단편집을 잠시 보다 덮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고 이불속으로 몸을 파묻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Mizu no naka no bagatelle>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지만 일어나기 싫어서 그대로 누워있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까만 어둠 속에 있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 일을 미루고 하루종일 게을러지고 싶은 날이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올해는 유난히 겨울비가 많이 내리는 것 같다. 어제는 비가 오다 이내 진눈깨비로 바뀌더니 오후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가을과 초겨울 한겨울이 반나절만에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2월은 계절이 뒤죽박죽 섞여있다. 사람의 마음이 날씨를 닮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찬겨울비와 눈이 번갈아 내리다 보면 가끔씩 봄날처럼 따스한 날도 찾아온다. 기분이 나빴다 좋아지듯이 날씨도 수시로 변한다. 사람도 날씨도 참 변덕스럽다. 지구를 살아있는 생물로 본다면 기후는 감정표현이 아닐까?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이론을 신봉하는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계절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는 것처럼 다들 변한다. 상황이 바뀌면 사람도 달라진다. 날씨는 지구의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는 좋은 일이 많았다. 매일 기분 좋은 일을 발견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20대 시절의 나는 삶은 아름답지 않지만 가치를 찾아내면서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했다. 곧 마흔을 앞두고 있지만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다. 작은 행복을 찾아서 사소한 기쁨을 발견하면서 산다. 이틀 전에는 내리는 함박눈을 보면서 녹차를 마셨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천천히 내리는 눈이 참 예뻤다. 책에서 본 설국에 여행 온 기분이었다. 눈은 하루 만에 전부 녹아 없어졌지만 좋은 기분은 남았다.
시카고에 사는 지인에게 눈 덮인 동네 풍경을 찍어 사진으로 보냈다. 시카고는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았다는 답장을 받았다. 교토에 사는 동생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다. 곧 3월이 온다. 온난화의 영향인지 3월 중순만 되면 거짓말처럼 모기가 날아다닌다. 봄은 짧고 여름은 길다. 겨울도 점점 짧아지는 모양새다. 몇십 년쯤 지나면 계절은 긴 여름과 따뜻한 겨울만 남을 것 같다. 사계절을 책이나 영상 같은 기록물로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피아노 선율 사이로 녹아든 빗소리가 잦아들고 있다.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났다. 희뿌연 블라인드 너머로 아침이 희붐하게 밝아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