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계획이 틀어지고 약속이 깨지면서 공들였던 일들이 무산됐다.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넘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몸과 마음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잠 못 이루는 날이 늘고 반대로 체중은 줄었다. 멍하니 그저 시간을 날려 보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흘렀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괜찮아졌다. 운동을 늘리고 저녁마다 러닝도 했다. 몸무게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지만 생활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신없이 지내는 동안 머리는 산발이 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울에 비친 내 꼴이 낯설고 우스웠다. 버려진 개처럼 초라해 보였다. 머리를 잘라야겠다는 욕구가 속에서 강하게 올라왔다. 미용실을 예약했다. 거의 두 달 만에 미용실을 찾았다. 하얀 가운을 두르고 의자에 앉았다. 빗질과 가위질이 시작됐다. 잘린 머리카락이 바닥에 비처럼 쏟아졌다. 여름 내내 달고 다녔던 수북한 더벅머리는 시원하게 떨어져 나갔다.
바닥 여기저기에 머리카락이 널려있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체모는 동물의 털처럼 보인다. 털 길이만 보면 단모종이다. 짧은 머리가 오랜만이라 거울 속에 보이는 모습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계산을 하고 나와서 오른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매만졌다. 홀가분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뚜렷하게 나아진 것은 없지만 기분은 분명 달라졌다. 머리를 자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동안 안고 있던 답을 알 수 없는 문제를 마음에서 덜어냈다. 엉망으로 뒤엉켜있는 고민도 함께 잘라냈다.
마음은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생각은 생각처럼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행위에서 의미를 찾는다. 청소하면서 번잡한 마음을 비우고 샤워하면서 지저분한 마음속을 씻어낸다. 머리를 자르면서 마음의 준비운동을 마쳤다. 사소한 일은 간단하게 결정하면 끝나지만 어려운 일은 결심이 필요하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생각을 멈추고 몸을 움직이려면 나름대로 준비가 필요하다.
집에 와서 보니 짧게 자른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눈은 금방 익숙해진다. 어색함은 잠깐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똑같다. 잃어버린 것들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놓친 기회를 아쉬워하고 지나간 사람을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을 증오하고 삶을 미워할 필요는 없다. 때가 되면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 헤어질 때가 찾아왔을 뿐이다. 잘려나간 머리카락처럼 지저분한 미련에서 눈을 돌렸다. 시선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정면을 향해야 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욕망 앞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서 매번 시간과 감정을 낭비한다. 경험이 늘고 나이를 먹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한 번씩 엇갈리고 때때로 놓치면서 아픔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다 지나간다. 어떻게든 산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진다. 삼시세끼 밥도 잘 넘어가고 밤이 새벽 담을 넘어갈 때쯤 지쳐서 잠이 든다. 짧은 머리가 더벅머리가 되는 것처럼 시간은 성실하게 흐르고 착실하게 과거를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