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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Sep 12. 2024

비를 피하는 동안에

 빗방울이 떨어진다. 저녁에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우산을 두고 나온 스스로를 탓하려다 그만두고 일단 뛰었다. 공원을 가로질러 커브를 돌았다. 주민센터 현관문을 향해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자동문이 천천히 열렸다 닫혔다. 그 순간 등 뒤로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간 발의 차이였다. 몇 초만 늦었어도 물에 흠뻑 젖은 생쥐꼴이 될 뻔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시야가 희게 물들었다. 길 가에 서있는 여러 대의 차 보닛 위로 물보라가 하얀 이끼처럼 두텁게 올라왔다.


 잠깐 내리다 그칠 비는 아니었다. 일기예보 앱은 소나기라고 표기했지만 아무리 봐도 집중호우였다. 국지성호우는 몇 시간씩 이어진다. 올해는 유난히 큰 비가 잦았다. 갑자기 내리다 사라지는 도깨비소나기도 난감했지만 그칠 줄 모르고 퍼붓는 폭우는 꼭 재난 같았다. 쾌적하고 안전한 실내에서 바라보는 창 밖의 비는 감성을 자극한다. 하지만 밖을 돌아다니다 예기치 않은 비바람을 만나면 감성은 날아가고 이성의 끈을 놓치게 된다. 강풍을 동반한 비는 우산을 써도 소용이 없다.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빗줄기에 두드려 맞는 기분은 분노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은 참 다행이었다.


 비가 잦아들 때까지 주민센터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집에서 2분 거리라 갇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추리소설에 자주 나오는 클리셰지만 도시에 사는 입장에서 앞으로도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적어도 몇 시간은 있어야 할 테니 앉을 곳부터 찾았다. 3층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 요새는 주민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만큼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용객은 나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바로 옆에는 문화센터 댄스수업이 한창이었다. 방음이 되는 문이 닫혀있었지만 스텝을 밟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창문을 두드리는 비가 만드는 리듬은 발소리와 잘 어울렸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의 종류는 다양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도 있었고 작년에 감명 깊게 본 손원평의 <타인의 집>도 보였다. 동화책도 정말 많았다. 동화는 사실 아이보다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다. 그동안 무엇을 잃어버리고 살았는지 무엇을 잊어버리고 지냈는지 일깨워주는 역할을 한다. 서고에 비치된 책을 보면 서가 관리자의 안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자기 개발서나 여러 분야의 실용서적도 많았지만 국내외 작가들의 소설이 다채롭게 구비되어 있었다. 좋아했던 작가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 속에 묻혀있던 기억들이 낡은 먼지를 털어내고 제 빛깔을 되찾은 느낌이다.


 올해 새로 찍어낸 클레어 키건이나 존 윌리엄스의 책을 보고 가슴이 설레었다. 담당자의 센스가 뛰어난 것 같다. 한참 동안 책장을 기웃거리다 에르난 디아스가 쓴 <트러스트>를 꺼냈다. 대학시절 좋아했던 정미경의 단편집을 읽으려다 막판에 생각을 바꿨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눈에 들어온 첫 문장부터 마음에 들었다. 행운은 사건과 함께 찾아오고 인연은 늘 우연에서 비롯된다. 책도 그렇다. 내가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고른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이 그런 날이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차분한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복선과 반전이 뒤섞인 흥미진진한 내용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졌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와 잘 어울렸다. 몰입하다 보니 순식간에 절반 넘게 읽어버렸다.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뻣뻣한 목과 어깨를 풀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창 밖을 봤다. 잿빛 구름 아래 폭포처럼 쏟아지던 폭우는 사라졌다. 굵은 빗줄기는 가느다란 가랑비로 바뀌어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우산을 접었다. 책장에 책을 꽂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절반은 내일 다시 읽기로 했다. 좋은 책을 만났다. 일기예보가 빗나가면서 갑자기 마주쳤던 비가 더는 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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