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을 나누고 계급을 가르는 경계선
아파트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물이다. 한국인들만 아는 한국의 이면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주거환경은 사회문화적 특성을 총망라한 지표다. 집값은 경제적 여건과 능력을 검증하는 역할을 한다. 아파트는 입주민과 외부인으로 사람들을 구분하고 수준과 등급으로 사회적 지위를 구별한다. 신분제에 가까운 수직적 계급의식과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가 깃들어있다. 검증절차를 통과한 사람들의 평균소득이나 경제상황은 대체로 비슷하다. 하지만 같은 아파트라도 더 비싼 로열층이 있고 평수와 동위치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외관은 평온해 보이지만 내부는 서열화가 상존하는 현실의 축소판이다.
사람들 간의 왕래를 막는 물리적인 벽은 없다. 그러나 집값은 맘대로 넘을 수 없는 공고한 장벽이다. 소득과 생활수준은 땅값을 따라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 나뉜다. 보이지 않는 또렷한 구분선을 따라 양극화가 극명한 데칼코마니를 만들어낸다. 삼시 세 끼 먹는 똑같은 삶이지만 장르가 다르다. 아파트는 사회적 신분을 구별하는 기준선이자 계층 간의 거주구역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예외는 없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마찬가지다. 업무지구와 상업지 그리고 학군 모두 아파트단지와 직결된다. 가장 비싼 아파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형성하면서 계층분포도가 만들어진다.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경제력과 신분이 낮다.
특히 학군은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결정된다. 3,4기 신도시나 재개발을 통해 대단지가 된 곳은 하나같이 아파트가 학교를 끼고 있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대부분의 아이들은 같은 단지에 거주한다. 계단 올라가듯 자연스럽게 주거지를 기준으로 학연과 지연이 형성된다. 생활수준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는 만큼 같은 환경에서 자라면서 동질감을 갖는다. 사는 세계가 다르므로 격차가 큰 계층끼리 만날 일이 없다. 물리적인 공간이 분리되어 있으므로 정서적인 교류나 접점이 활성화될 기회는 드물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 동물이다. 극심한 차이점은 차별의 근거가 될 수밖에 없다.
계층 간 화합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시점은 폭발적인 아파트 공급증가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아파트의 등급이 체계적으로 세분화되면서 신분제는 공고해졌다. 이제는 동네 수준이 사람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다. 계급사회에서 집값은 인류학적 통계에 가까운 과학으로 통한다. 비싼 아파트를 사면 그 즉시 신분과 함께 인적 인프라를 보장받는다. 최고급 아파트는 부와 인맥을 대물림하는 가장 안정적인 수단이다. 강남아파트에 살면 강남구주민이 될 수 있다. 인간관계는 거주구역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어울리는 사람들의 수준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프리미엄을 누린다는 건설사의 슬로건은 과장이 아니다. 엄연한 현실이다.
20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신축 아파트 트렌드로 커뮤니티 시설이 급부상했다. 다양한 편의시설은 그전에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양상이 달라졌다. 경제사회적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만 커뮤니티에 들어갈 수 있다. 커뮤니티 시설은 입주민들 사이의 공고한 결속을 의미한다. 신원이 보장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지낼 수 있는 검증된 교류의 장이다. 자주 보이는 프레스티지라는 수식어는 품격이 아니라 신분을 의미한다. 단지 밖의 외부세계와 얽힐 일 없이 괜찮은 사람들만 만나면 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프라이버시는 프라이빗한 가치를 갖는다. 아무나 가질 수 없고 아무나 들이지 않는 선택받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프리미엄이 핵심가치다.
강남 안에서도 압구정동, 청담동, 대치동 간의 미묘한 격차가 존재한다. 최고급 아파트 입주민이라도 원주민과 외지인이라는 서로 다른 꼬리표가 붙어있다. 같은 주거지를 공유하는 상류층이라도 상하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뼈에도 등급을 매기던 유구한 한반도의 전통은 여전히 살아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분은 압도적인 수준의 자본으로 만든다.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프리미엄아파트가 인기를 끌더니 마침내 백억 대의 하이엔드아파트가 등장했다. 시공사가 같아도 지역과 분양가 그리고 부대시설에 따라 체급이 다르다. 돈 좀 벌었다고 어깨에 힘 좀 준다고 높은 자리를 함부로 넘볼 수 없게 급을 계속 나누고 있다.
서울의 하이엔드 아파트들은 도시 속 작은 왕국이다. 1년 관리비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 연봉에 육박한다. 최고를 지향하는 만큼 호텔 수준의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집안일과 식사뿐만 아니라 발레파킹과 세차까지 해준다. 시간을 절약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돈을 쓰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을 대신해 주는 서비스를 구입하면 여유는 대폭 증가한다. 의식주에서 주는 여유를 가장 잘 드러내는 요소다. 주거생활에 누린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다. 평균수명은 전반적으로 늘었지만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여가수명은 고소득층의 전유물이다. 그래서 집을 보면 삶과 계급이 동시에 드러난다.
한국은 아파트공화국이 아니라 아파트봉건제다. 아파트단지는 사실상 중세시대의 성이나 다름없다. 집값과 땅값은 계급을 나누는 사회적인 방벽이다. 입주민과 외부인을 구별하고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출입관리시스템은 물리적인 장벽이다. 아파트는 닫힌 사회를 지향한다. 외부와 철저하게 거리를 두면서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해자를 형성한다. 비싼 아파트일수록 개방성은 낮고 폐쇄성은 높다. 주민자치를 통해 자율적인 권력까지 행사한다. 단지 내 노동자인 피고용인의 입지는 거주구역 내 딸린 부속시설과 같다. 급여와 함께 신분을 부여받는다. 입주민을 제외한 사람은 존중 받을 수 없다.
10년 전쯤 휴먼시아 거지라는 표현이 전국적으로 이슈화 됐다. 한국 사회에 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실제로 아이들은 자기소개를 할 때 거주하는 아파트 브랜드를 입에 담았다. 브랜드 등급표가 상식으로 통하면서 사람들 간의 서열을 결정했다. 거주지는 거지와 거물을 나누는 현대판 호패가 됐다. 긴 설명 없이 아파트 이름만 말하면 끝이다. 10년이 지난 현재 차별의 기준은 과거보다 더 세분화됐다. 구축과 신축, 서울과 지방, 지역 내의 상급지와 하급지, 강서송 마용성 노도강까지. 체계적으로 인간의 등급을 나눌 수 있게 됐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지만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는 신분제다.
Apartments are part of the status syst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