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위기의식이 없을 때 찾아온다
미국 국무부는 최근 고학력 전문직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EB-1·2 취업비자 통계를 발표했다. 1,2위는 IT 강대국인 인도와 중국이 차지했다. 대한민국은 4위였다. 그러나 인구 10만 명당 발급비율은 10.98명으로 압도적인 1위였다. 0.94명인 중국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의학을 비롯한 이공계 전반의 박사급 고학력자들이 한국을 떠나고 있다. 코리아 엑소더스다. 미국의 AI와 반도체 분야 박사급 종사자 평균연봉은 국내보다 몇 배나 높다. 식비와 주거비를 비롯한 생활비가 한국보다 비싸도 남는 장사다. 무엇보다 미국은 국가나 기업이나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미국은 기술자와 전문가를 대우한다. 2차 세계대전 시기 페이퍼클립 플랜을 통해 각국의 석학들을 포섭하면서 미국의 기술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AI혁명의 주도권을 거머쥐기 위해 미국은 다시 전 세계의 인재를 흡수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국가경쟁력이 하락하면 인재유출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장기침체의 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국가는 미국뿐이다. 미국은 위기 속에서도 기술투자와 신사업육성을 그만둔 적이 없다. 위기를 매번 도전으로 극복했다. 위기극복의 DNA는 한국보다 미국에 걸맞은 표현이다. 성장둔화와 경쟁력 하락을 동반하는 ‘선진국의 저주’를 이겨낸 국가는 미국뿐이다.
미국의 입지를 넘보던 중국은 성장에 제동이 걸렸고 일본은 여전히 힘을 못쓰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불황의 늪에 빠졌다. 고학력 전문직들이 모국을 버리고 등을 돌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 침체의 그늘 속에서 한국은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국가경쟁력 순위는 이미 조금씩 내려가고 있다.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만든 한국식 수출주도성장은 한계에 직면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경쟁국보다 개선된 기술력을 통해서 양질의 상품을 판매하고 동시에 시장까지 개척해 왔다. 미국, 일본, 독일 같은 기술강국의 틈새를 파고든 특성화 전략도 성공했다.
그러나 후발주자들이 한국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역사는 반복이다. 한국이 선진국들의 기술지원과 제품수주를 받아서 성장한 것처럼 중국이 치고 올라왔다. 단순 가전이나 만들던 OEM 업체들이 카피와 벤치마킹을 반복하면서 기술개발에 성공했다. 기술유출과 불법적인 도용도 있었지만 시장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본다. 만년 3군 취급하던 중국산 스마트폰이 시장을 점령했다. 생활가전의 명가로 꼽히는 LG와 삼성전자의 로봇청소기가 중국제품을 상대로 참패했다. 2010년대 초 소니와 파나소닉이 TV시장에서 한국에게 밀렸던 전례와 같다.
매를 먼저 맞았던 일본 기업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서 살아남았다. 생활가전분야에서 한국에게 패배했던 소니는 이미징센서, 금융, 게임과 엔터산업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신사업에 집중한 소니는 14년간 주가가 400% 넘게 상승했다. 삼성전자의 주가 상승률보다 무려 2배나 높다. 파나소닉은 전기차 배터리산업에서 성장을 토대로 최근 클라우드 물류공급망 기업으로 변신했다. 미국과 비교하면 초라하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은 기술개발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더 밀려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R&D와 신사업육성에 사활을 걸었다.
한국은 수출시장에서 입지가 줄어드는 데다 인구감소로 인해 내수시장의 수요마저 감소했다. 진퇴양난이다. 기업들이 해외시장을 확대해야 하지만 중국의 공세가 매섭다. 중국은 인수합병을 통해 브랜드가치나 네임밸류가 높은 글로벌기업들을 가져왔다. 명품 아웃도어 아크테릭스는 중국의 컨소시엄에 넘어갔다. 지리자동차는 볼보를 인수했고 벤츠의 최대주주는 중국국유기업이다. 세계 3대 산업로봇 기업인 독일 쿠카도 중국 가전업체인 메이디가 인수한 지 오래다. 적극적인 M&A를 통해 중국은 기술력과 미래수요를 안정적으로 확보했다.
일본은 R&D에 집중했고 중국은 M&A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입했다. 그러나 한국 대기업들은 부동산 투자에 집중했다. 신세계는 테마파크에 4조, 롯데는 쇼핑센터에 7조를 쓰기로 했다. 현대차는 강남땅을 10조를 주고 샀다. 부동산평가액은 오르겠지만 대기업들의 글로벌경쟁력도 오를까? 위기를 감지하자마자 재계는 익숙한 카드를 꺼냈다. 체질개선과 경쟁력확보라는 명목으로 희망퇴직을 받는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구조조정과 원가절감은 만능이 아니다. 개발자를 대거 해고했던 메타는 메타버스를 버리고 AI모델과 온라인광고에 집중했다. 주가는 500% 넘게 상승했다. 선택과 집중은 실력이 있을 때나 의미 있는 것이다.
모험을 망설이면 성장할 수 없고 도전을 주저하면 성과는 없다. 신사업투자, 기술개발, 인재양성, 해외시장개척, 공격적 인수합병 모두 한국 기업들과 거리가 멀다. 머뭇거리는 동안 우리는 저성장의 악순환에 빠졌다. 기술력을 앞세운 경쟁자들에게 밀리면서 수익은 감소했다. 경영방식은 이미 소극적으로 변했다. 사업확장이 아니라 점유율 방어에 치중하고 있다. 해외진출을 노리던 기업들 마저 내수시장에만 목을 매고 있다. 수성은 아무리 잘해봐야 현상유지에 불과하다. 적극적인 공세를 해야만 영토를 확장할 기회를 얻는다. 전투에서 몇 번 지더라도 경험이 쌓이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스타트업들도 문제다. 기존 산업에 플랫폼만 차려놓고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서 수수료를 받아먹는다. 신기술개발이나 고부가가치 첨단사업을 주업으로 하는 스타트업은 극소수다. 국내 스타트업 태반은 서비스업에 치중되어 있다.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씌워놓고 택갈이해서 몸값을 올려 받으려는 얄팍한 상술이 판을 친다. 동남아나 중국, 미국과 비교해 보면 한국 스타트업들은 글로벌 VC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는 중이다. 누적투자 금액이 크게 벌어졌다. 대기업은 도전을 주저하고 스타트업은 엑시트만 노리고 있다. 경쟁력과 기술력으로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폐업하는 것이 시장의 이치다.
신흥강자들에게 밀려서 한국은 점점 추락하는 중이다. 인재는 놓치고 곳간은 걸어 잠갔다. 기술력도 몇 계단이나 하락했다. 2010년대 베트남에서 주재원으로 일했던 친구는 베트남의 성장세가 무섭다고 말했다. 인구는 노동력과 구매력 그리고 인재를 모두 충족시키는 성장의 무기다. 통신업을 하던 베트남의 FPT는 올해 엔비디아의 파트너가 됐다. 두 기업은 함께 AI와 클라우드로 구동되는 첨단 하드웨어를 개발한다.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FPT는 최첨단 ICT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우리보다 아래로 취급했던 국가들이 IT업계의 강자가 됐다. 인도네시아는 고젝을 싱가포르는 쇼피와 가레나를 갖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경쟁자였던 TSMC는 꿈의 시총 1조 달러 기업이 됐다.
삼성전자는 수십조를 투자하고도 결국 TSMC의 벽을 넘지 못했다. 엔비디아를 잡겠다던 인텔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됐다. 원가절감과 구조조정은 일시적인 경영지표를 개선하는 미봉책이다. 잠깐 통증을 진정하는 진통제일 뿐이다. 체질개선은 기술개발과 시장개척을 통해서만 확보할 수 있다. 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했던 IBM은 소니와 도시바에게 패배했다. 30년간 IBM은 엔터프라이즈, IT설루션, 하이브리드 클라우드 등 신사업을 개척하면서 살아남았다. 2010년대 애플의 시장장악으로 10년 동안 장기하락을 겪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과감하게 모바일사업을 버리고 클라우드에 집중했다. 한국도 이제 똑같은 입장이 됐다.
선진국의 저주는 두려움과 안일함에서 비롯된다. 미국과 일본이 그랬듯이 한국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일이다. 인도와 베트남의 IT개발 아웃소싱이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업계 종사자인 지인은 외국인들의 작업 숙련도가 낮다면서 완성도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4년이 지난 현재 발언의 당사자는 구조조정 당했다. 국내 엔지니어와 개발자 자리는 해외아웃소싱업체가 빠르게 채워나가는 중이다. 위기는 위기의식이 없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위기론이 나올 때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이건희 회장의 발언이 회자된다. 전부 다 바꾸고 개선해야 한다지만 정작 컨트롤타워는 그대로다.
위기돌파는 슬로건으로 그칠 뿐이다. 생각을 바꿀 수 없다면 자리를 갈아치워야 한다. 그러나 물러나거나 내려가는 이들은 없다. 오너는 지위를 유지하고 경영진은 밥그릇을 지키려는 아집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 기업들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타국 기업들의 사례를 보고도 반면교사하지 않았다. 위험신호를 보고해도 듣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한 고학력 전문가들은 모국을 버리고 떠난다. 업계와 제계 그리고 학계까지. 경직된 조직문화에서 비롯되는 말뿐인 쇄신이 팽배하다. 낡은 마인드와 안일한 특권의식이 바뀌지 않는 다면 혁신도 미래도 없다.